(크레딧리포트)효성의 고해성사

by강종구 기자
2006.02.27 07:00:01

[이데일리 강종구기자] 고해성사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한달여만 지나면 신부님은 떠나고 성당의 문은 닫힐 것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과거의 잘못. 털고 갈 것이냐, 숨기고 그냥 가면서 가슴을 졸이며 살 것이냐의 판단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는 참 오래 걸렸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 유료뉴스인 `마켓플러스`를 통해 2월 24일 오후 6시 26분에 이미 게재됐습니다)

몇년을 주저하던 분식회계를 2006년 2월 고백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오는 2007년부터 전면 도입되는 분식회계 집단소송제를 앞두고 정부가 올해안에 고백을 하면 용서를 해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12월 결산 법인인  효성은 3월말까지는 정기주주총회를 해야 하고 그 전에 외부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이번 기회를 넘기면 당장 내년에 집단소송에 걸릴지도 모르는 판이니, 회계법인 입장에서도 봐줄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채 시장에서는 아직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있는 굴지의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효성의 결단은 그 기업들에게 경종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효성이 드디어 고해성사를 했다. 98년 이전 해외 판매법인의 막대한 부실을 매출채권 등 자산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해 왔던 분식을 23일 자진해서 공시했다.

총 3500억원의 분식 규모는 어찌보면 효성(004800)의 기업규모나 현금 창출력으로 볼 때 큰 규모가 아닐 수 있었지만 국내 굴지의 그룹인 효성의 분식회계에 주식시장의 충격은 제법 컸던 모양이다. 턴어라운드 기대를 안고 오름세를 유지하던 주가는 `헤드라인 리스크`에 수직 하락했다.

그러나 효성의 분식회계는 신용평가사나 크레딧애널리스트, 투신의 회사채 담당 펀드매니저 등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과거였다. 지난 수년 동안 효성에 "과거 분식을 다 털고 새출발하라"는 충고를 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선지 고백 사실에 잠시 놀라기는 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다는 듯 반응도 담담했다.  강일진 한국기업평가 평가2팀장은 "효성의 분식회계 규모는 우리가 예상한 범위내에 있으며 지난해 등급을 하향조정할 때 이미 반영했다"며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현재로서는 당장 등급조정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관찰대상`에 올리는 정도의 조치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김홍미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의 반응도 비슷했다. 향후 대응에 대해서는 견해 표명에 난색을 표한 김 연구원은 "모르는 일이 터진 건 아니고 다 알고 있었던 것"이라며 "분식 규모도 지급보증 금액과 거의 유사하며 지난해말 등급을 하향조정할 때 해외부문 문제를 이미 반영했다"고 말했다.

길기모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최근에 회사채 발행과 해외부문에 대한 증자를 함께 했기 때문에  (분식을) 해소하긴 할 거라고 생각했다"며 "심리적인 영향으로 효성 채권금리가 오르긴 할텐데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효성이 밝힌 분식 규모에 대해 "짐작했던 범위 내에 있다"고 말했다.

분식회계 고백을 주가에 반영한 주식시장과 달리 채권시장은 무덤덤했다. 주식시장처럼 헤드라인 리스크를 반영하기는 했지만 자기등급(BBB+)대비 스프레드를 단 1bp 벌려 놓는 선에서 체벌(?)을 끝냈다.



효성의 신용등급은 지난해 11월 30일 한국기업평가가 BBB+로 하향조정하기 전까지 무려 5년동안을 A등급에 머물렀다. 효성이 A급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던 때도 신용평가사들은 효성의 해외법인의 분식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규모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신용평가 애널리스트의 회상을 잠시 들어보자. 이 애널리스트는 수년전 과거 효성물산의 해외 판매법인 몇 군데의 매출채권 등 자산사이드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합쳐 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자산쪽에서 4000억원 내외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더란다.

그는 효성측에 "3000억~4000억원 정도 분식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밝힌다고 회사가 발칵 뒤집할 것도 아닌데,  털고 가라"고 조언했단다. 물론 효성측에선 분식했다고 밝힐 수가 없었을 테니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회사채 평정이 가능한 신용평가 3사중 가장 먼저 등급을 떨어뜨린 한기평의 경우엔 지난해 등급하락을 단행할 때까지 효성측과 지난한 씨름을 해야 했다. 해외법인 재무제표에 숫자상 비는 게 많고, 그것때문에 시장에서 의심을 받고 있는데 털고 가는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고 한기평은 여러 차례 얘기했다.

결국 지난해말부터 이어진 신용평가사들의 등급 하향 조치는 `인내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룹 구조조정의 느린 속도가 답답했고, 업황은 나빴고 실적도 악화됐다.

더구나 채권시장에서는 해외판매법인에 대한 깊은 `의구심`때문에 회사채 가격을 A급 기업에 맞지 않게 낮게 매기고 있었고, 효성도 불확실성 해명에 적극 나서지 않아 매수세는 거의 실종상태였다.



A등급과 BBB+등급은 마치 투자등급과 투기등급만큼이나 큰 차이. 신용평가사들의 등급 하향 조치에 대해  `지나친 처사` 였다며 질타하는 이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2004년 초 처음으로 효성 해외판매법인 문제를 제기했던 굿모닝신한증권의 두 크레딧애널리스트인 윤영환 연구위원과 길기모 연구위원이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효성의 귀환`이란 보고서를 통해, 신용등급이 떨어진 채권에 대해 이례적으로 사실상의 매수추천을 하고 나섰다. "등급하락이 오히려 효성에게는 반전의 모멘텀이 될 것"이며 "현금흐름과 재무구조를 감안할 때 더 이상의 등급하락은 없다고 보면 냉정하게 구조조정 노력과 재무정책의 변화를 평가할 기회"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이들은 또 "재무제표 비교분석을 보자면 A-나 BBB+ 어디에 갖다 놓아도 큰 무리가 없다"며 "기업규모와 실적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BBB+보다는 A-로 기우는 것이 사실이다"고 썼다.

이들은 해외법인의 문제, 다시말해 효성의 분식 문제가 상당히 해소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시장이 원하는 적극적인 대응(정보공개)은 없었지만 해외 현지법인 관련 불확실성의 정리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고 한 것.

이들은 "(해외 판매법인 문제는) 효성 디스카운트의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이런 사안을 버선목 뒤집듯이 속 후련하게 접근하기는 어렵다"며 의혹이 분식회계에 맞닿아 있음을 시사하고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지급보증이) 실질적으로는 상당수준 축소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경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연간 100~200억원 정도인 `기타의대손상각`외에 지분법손익, 자본조정, 경상적 거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조조정(분식해소)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최대 골칫거리인 효성아메리카 문제는 여전히 무거웠다. 미국 판매법인이라는 특성상 매출채권이 다소 많을 수는 있지만 총자산과 차입금 규모는 상식수준을 벗어나고 있었고, (자산규모가 부풀려지다 보니) 총자산회전율(매출액/총자산)이 매우 낮았다.

이에 대해 두 애널리스트의 권고는 "어느정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더라도 전체적인 수준과 추세를 감안해 효성 자체적인 구조조정을 지켜봐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효성은 지난달 27일 효성아메리카에 1161억원 규모의 화끈한(?) 출자를 단행했다. 하루 앞선 26일엔 회사채 1800억원을 찍었다. 효성은 채권발행과 자회사 출자가 무관하다고 했지만 시장의 그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어쨌든 대규모 출자로 효성아메리카의 부실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출자는 분식회계 고백을 하기 위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선 익명의 애널리스트는 "그동안 조금씩 해소를 해 오다가 지난달에 (출자)한 것으로 부실을 거의 다 털었다고 봐야 한다"며 "더 이상 나올 부실은 거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윤영환 연구위원은 "과거 부실은 이미 단계적으로 축소되고 있었고 그동안은 지분법조정 등의 방법으로 자본잉여금에서 깠다가 이번에 그것을 돌려놓고 이익잉여금에서 깠다"며 "미국 법인이 약 3000억원 정도 돼 보이는데 유상증자를 한 것도 있고 해서 크게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분식회계에도 불구하고 최근 회사채 시장에서 효성 채권은 유난히 약세를 보이고 있다. A급에서 5년을 군림하던 채권이 BBB+로 떨어진 뒤에도 자기등급 대비 디스카운트 폭이 계속 벌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26일 급하게 보였던 회사채 발행 이후 스프레드는 크게 벌어졌다. 당시는 효성에 상당한 자금여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지난해말에는 바이백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2월에 만기도래 회사채가 있었지만 부동산 매각자금 등을 감안하면 자금이 쫓기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27일 효성아메리카 증자때문에 발행을 무리하게 밀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당시가 구정 직전으로 자금사정이 최악인 상황에서 시장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진하다 보니 민평대비 20bp가량 높은 금리에 발행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감안해도 효성 채권의  디스카운트의 배경에 해외 판매법인에 대한 시장의 의심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식의 굴레를 벗어던진 마당에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중국 생산법인이 상당한 투자규모에도 불구하고 정상화가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실적이 꽤나 악화되고 있다.

24일 공시에 따르면 2005회계연도 영업이익은 848억원으로 전해 1776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회사측은 실적부진의 이유로 보수적 관점의 대손상각비 460억원와 재고자산 평가감 128억원등 총 588억원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용평가사들은 범용원사 부문의 경쟁력 약화와 스판덱스 영업환경의 저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원사의 채산성 악화가 전체적인 영업수익성을 떨어뜨렸고 투자가 집중된 스판덱스도 세계적인 공급과잉상태라는 것.

그러나 실적문제가 이미 낮은 채권가격을 더 떨어뜨릴 정도의 악재는 아닌 것 같다. 주력제품 대부분이 국내와 세계적으로 1~2위의 시장지배력을 보유하고 있고 안정적인 현금창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 대규모 투자도 일단락된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회사의 재무정책에 관련돼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매출액 5조원 규모의 기업에 걸맞지 않게 효성 회사채는 도매시장에서 거래가 거의 되지 않는다. 투신사 채권형 펀드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효성 채권을 다루는 증권사도 메이저급이 아니다. 공모채권 발행을 포기하고 사모 사채로 돌아서는 모습도 최근 보였다.

또 자금조달 경로는 지나치게 산업은행 의존적이다. 차입금이 됐던, 회사채가 됐던 마찬가지다. 만기가 임박한 1건을 제외한 모든 미상환 공모사채의 주간사가 산업은행이었고 발행액의 상당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했다.

이에 대해 시장 일각에서는 "효성 스스로 시장을 왕따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효성과 시장, 양쪽이 서로를 왕따시키고 있는 셈인데 그만큼 시장과의 거리가 멀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