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경북 울진

by김명상 기자
2023.02.24 00:00:30

모든 걸 품어주는 듯한 짙푸른 후포 바닷가
이른 아침부터 삶의 기운 가득한 대게 위판장
기암괴석과 굽이굽이 계곡 사이 자리한 불영사
궁궐 목재로 쓰이는 금강송 기운 받아 힐링

[이데일리 김명상 기자]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울진 후포항에서 본 동해
신경림 시인이 쓴 ‘동해바다 - 후포에서’라는 시의 일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해를 바라보며 시인은 자기 성찰과 동시에 삶의 변화를 소망했다. 차에서 쪽잠을 자다 후포항에 내렸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바다를 마주한 뒤 한동안 감탄사만 내뱉었다. 겨울의 푸른 동해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바위에 앉아 쉬는 기러기마저 조각상처럼 보인다. 시인의 표현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만큼 깊고 짙푸른 바다였다. 뒤에서 그만 식사하러 들어가자는 말이 몇 번이나 들렸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울진은 그렇게 처음 방문한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울진은 호젓한 겨울의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딱 맞는 여행지다. 동쪽으로는 동해를,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을 접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수려한 경치로 유명했다. 주변 지형이 험준하다 보니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이 살아 있고, 겨울 별미인 대게는 꽉 찬 살과 쫄깃한 식감으로 미식가를 유혹한다.

울진의 바다는 한적함이 매력이다. 이름이 알려진 다른 동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카페, 전망 좋은 숙소, 식당 간판 대신 번잡스럽지 않은 시골 포구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방문객을 반긴다.

울진 후포항 위판장
조금은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은 산산이 깨어졌다. 평소의 후포항은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흐르지만 이른 아침 후포항 위판장은 펄떡이는 삶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위판장으로 가니 횟집 수조에서만 보던 대게가 바닥에 지천으로 깔려있다. 어부들이 바구니째로 대게를 담아 내려놓자, 기다리던 아주머니들이 바쁘게 줄을 맞춰 늘어놓는다. 질서정연하게 깔린 대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군의날 사열식에 참석한 듯한 기분마저 든다.

배를 드러내고 누운 채 버둥대는 대게로 가득한 위판장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대게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날카롭다. 경매사의 목소리에 맞춰 대게 경매가 진행되면 사려는 중매인들이 상태 좋은 대게를 점찍고 가격을 적어 보여주고 입찰한다. 매각된 대게는 빠르게 정리돼 어디론가 이동하고, 빈자리에 또 다른 대게들이 깔린다. 일반인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기 힘들 만큼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끝난다. 에너지 가득한 위판 풍경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6월부터 11월까지는 대게 포획 금지 기간이기 때문이다.

낙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위판장에 있자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듯하다. 위판장을 나서는 길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활기가 넘치는 현장은 평소 잠에 취해 힘겹게 아침을 맞이하던 일상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아침부터 이렇게 바쁜 모습을 보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하하!”

36번 국도변에 있는 불영사계곡은 기암괴석과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물이 어우러진 명소로 길이가 15㎞에 이른다. 울진이 자랑하는 천연자원으로 광대코 바위, 주절이 바위, 의상대 등 이름이 붙은 명소가 30여 개소에 달한다.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맑은 물이 돌아 흐르는 유려한 물줄기와 어우러진 흰색 화강암은 웅장하지만 풍화되어 기괴하기도 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풍광은 차에 앉아 감상해도 좋지만, 불영사로 가는 길에 놓인 2층 팔각정 구조의 선유정과 불영정에서 봐도 좋다.

굽이굽이 계곡 속에 숨은 불영사는 서기 65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여성 스님이 수행하는 비구니 사찰로 지정된 곳으로, 서편에 부처의 형상을 한 큰 바위의 그림자가 항상 연못에 비춰서 불영사로 불리게 됐다.



불영사 대웅보전
불영사는 조선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와도 인연이 깊다.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던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정실인 인현왕후는 버림받고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5년이란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내던 인현왕후는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울다 지쳐 잠이 든다. 설화에 따르면 인현왕후의 꿈에 한 백발 스님이 나타났다. “불영사에 있는 중인데 3일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길 테니 괴롭더라도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고 사라진 스님. 너무나 생생한 꿈에 인현왕후는 3일을 기다렸는데 노승의 말대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궁에 돌아온 후 너무나 신기했던 인현왕후는 꿈속에서 본 스님을 찾았는데 1516년에 입적한 양성법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숙종이 절 주변의 10리 산과 전답을 불영사에 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꿈에 나타났다는 양성법사의 흔적은 불영사 근처에 남아 있다. 불영사 입구로 가는 길 주변에 양성법사의 사리(구슬 모양의 유골)를 안치한 묘탑과 비석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불영사를 떠받치고 있는 돌거북이
불영사 관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거북이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보전 기단 밑에 두 마리의 돌거북이 머리가 보인다. 불영사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몸통은 보이지 않는데 대웅보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석가여래 좌상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있는데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바라보면 작은 금색 거북이가 좌우로 한 마리씩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한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환경을 품은 울진 힐링 여행의 중요한 목적지 중 하나가 왕피천생태탐방로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생태자원과 청정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트레킹 명소로 유명한데 ‘왕피’라는 지명이 독특하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한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만큼 깊고 험한 곳으로 왕피천에는 1급수에만 서식하는 버들치를 비롯해 산양, 수달, 사향노루 등 다양한 멸종위기 동물과 산작약, 노랑무늬붓꽃 등의 멸종위기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굴구지산촌마을의 은어 나무조각상
왕피천생태탐방로 2구간이 지나는 굴구지산촌마을은 7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사시사철 맑은 물과 울창한 금강소나무 숲을 볼 수 있다. 마을 인근의 왕피천으로 가는 입구에는 나무로 만든 은어 조각상이 서 있다. 은어가 많이 잡히기 때문인데 여름철이 되면 인근에서 몰려온 강태공들이 그물을 치고 새벽부터 은어 잡기에 열중한다고 한다.

여름이면 조용한 굴구지산촌마을이 떠들썩해진다. 매년 6월 중순에 ‘왕피천 피라미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굴구지 마을 사람들은 왕피천 계곡에서 대나무를 이용한 전통 방식으로 피라미를 잡아 냇가에서 매운탕을 끓이고, 몸을 보양하며 더위를 식혔는데, 이것을 지난 2008년에 지역 축제로 되살렸다. 행사 중에는 낚시대회, 은어잡기, 왕피천 보물찾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열린다. 가족과 함께 조용한 곳에서 자연 생태를 벗삼아 일상의 묵은 때를 벗길 수 있는 행사다.

청암정 앞을 흐르는 왕피천
마을에서 약 1.4㎞ 떨어진 곳에는 청암정이란 작은 정자가 있으니 놓치지 말자. 수려한 자연과 물빛에 취하게 되는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정자로 내려가니 짙은 비취색 물빛이 눈을 강타한다. ‘계곡 속 몰디브’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물빛이 주변의 하얀 바위,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지는데 감상하다 보면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뛰어든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모습에 취해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청암정의 마력에 제대로 빠졌음을 실감하게 됐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각도에 따라 물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즐기면서 숨을 크게 쉬면 그 어떤 복잡한 생각들도 저절로 사라질 것만 같다.



일본 교토의 고류지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재다.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아주 흡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화재에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대에 한 대학생이 반가사유상에 반해 끌어안다가 불상의 새끼손가락 부분을 부러뜨린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국보 1호가 피습당했다” 등의 표현을 쓰며 매우 분노했고,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복원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불상의 재질을 조사했는데 한국의 금강송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 때문에 목조 반가사유상은 자체 제작이 아니라 신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전해졌다는 논란이 일게 된다. 진실 공방을 떠나 일본인들이 받았을 충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금강송테마전시관에서 바라본 금강송과 설경
‘소나무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금강송은 울진을 비롯해 영동 지방에서 자라는 품종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한다. 금강송은 조선시대 궁궐을 짓는 목재로 쓰였는데 규모가 큰 궁궐을 지탱하려면 곧고 튼튼하고 변형이 적은 금강송보다 뛰어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송은 임금과 왕후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만큼 색과 향이 아름다우며 잘 썩지 않아 오래도록 아낌을 받았다. 지금도 목조 문화재를 복원하고 보수하기 위해 금강송이 쓰이고 있는데, 울진에서는 소광리를 비롯해 9개소가 문화재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울진 금강송테마전시관에 가면 금강송의 역사와 문화적 내용을 학습할 수 있다. 금강송이 지닌 가치와 생태적 내용을 담은 각종 체험시설을 만나고 나면 울진 곳곳에 솟아 있는 금강송이 달리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