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해군 망가뜨린 똥별…“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해 오늘]
by김형일 기자
2024.08.27 00:01:01
무리한 항해·경계 태만…부하들 사지로
이순신 모함으로 백의종군케 한 원균
공신 추증…매년 음력 7월 15일 제사
[이데일리 김형일 기자]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전선 163척의 최강 해군이 12척의 오합지졸 군대가 되고 말았다. 전력 손실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해군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내 정치 혼란, 사회경제적 기반 파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리더 역량이 부족했던 장수가 조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직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공적을 부풀렸으며 급기야 상관을 모함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과적으로는 상관의 자리를 차지했고, 병사들을 사지로 몰았다.
무능과 탐욕으로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은 원균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의 장계(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벼슬이 없는 말단군인으로 전쟁에 참전) 신세가 됐다. 이순신 장군의 자리였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의 차지였다.
원균은 칠천량해전에 앞서 무리한 항해와 적의 기습으로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을 상당수 잃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 장군은 직접 출정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원균을 경남 사천으로 연행해 곤장을 때렸다. 원균에게 직접 출정할 것도 지시했다.
결국 원균은 전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왔다. 그러나 대결을 회피하며 약 올리는 일본 수군에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왜군을 무리하게 쫓은 탓에 노를 젓는 노군들은 탈진해 쓰러졌으며 물을 싣고자 이동한 부산 가덕도에서는 기습공격을 당하자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원균은 부하의 반대에도 수군을 칠천량에 주둔시켰다. 부하 장수 배설이 “칠천량은 육지로 움푹 파인 형세에다, 양옆이 산등성이로 시야가 차단돼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이곳에 정박하면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이를 묵살했다.
이후 원균은 의욕을 잃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모두가 지쳐 잠든 사이 칠천량해전이 시작됐다. 왜군은 2~10척의 배로 조선 수군 진영을 자유롭게 누볐으며 판옥선을 불태우거나 빼앗았다. 당시 조선 수군 지휘부였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이때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원균은 주력 함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동시킨 뒤 불살랐으며 지상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힘들여 쌓아놓은 판옥선을 교전 없이 완전히 없앤 것이다. 이때 항전하겠다며 전선을 이탈한 판옥선 12척만이 후일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명량대첩에 쓰였다.
칠천량해전 후 원균은 자취를 감췄다.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은 왜군에 의한 전사였으나 도망 다니는 원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원균이 언덕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몸이 비대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고 죽음을 모면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원균의 그릇된 판단으로 조선 수군이 대패하면서 국지전 형태였던 정유재란은 전면전으로 전환됐다. 칠천량해전 패전으로 힘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바다 방어선이 뚫리면서 전라도는 왜군의 차지가 됐다.
그러나 전란 후 원균은 이순신·권율 장군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추증됐으며 매년 음력 7월 15일 그의 제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두고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명성이 널리 퍼진 이순신과 권율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 강화 목적으로 원균을 같은 반열에 올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원균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75호로 현재 경기도 평택에 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이 묘연한 만큼 시신이 없는 가묘에 불과하다. 실제 원균의 시신은 경남 통영에 있는 엉규이 무덤에 매장됐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들은 엉규이가 원균의 지역 발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엉규이 무덤은 별도의 안내문이나 이정표 없이 잡초에 덮여 방치돼 있다.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 관계,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라는 낙인 때문인지 후손들조차 외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