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5천’ 각서 쓰고도 불륜…끝은 애꿎은 죽음이었다 [그해 오늘]

by이재은 기자
2023.10.23 00:00:00

2014년 초교 동창모임서 내연남 만나
피해자에게 불륜 사실 흘리는 등 만행
각서 쓰고 결별 약속하고도 불륜 계속
피해자 살해하고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1심서 징역 25년…2심서 무기징역 선고

[이데일리 이재은 기자] 2017년 10월 23일 대법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40대 여성의 상고를 기각했다고 밝혔다. 이 여성은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거나 그의 남편이 범행했을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륜남의 아내를 독극물로 살해한 한모씨에게 무기징역이 확정된 날이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사진=이재은 기자)
사건이 발생한 날은 2015년 1월 22일이었다. 한씨는 전날 오후 10시 32분께 소주를 산 뒤 내연남의 아내인 피해자 A씨의 집 근처로 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A씨는 남편인 B씨에게 한씨와 만나기로 한 것을 알리고 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A씨는 22일 새벽 5시 11분께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고 의료진은 40분간 심폐소생술을 한 뒤 사망 선고를 내렸다. 사인은 청산중독이었다.

한씨가 이날 A씨 집 밖을 나온 것은 00시 46분께였다. A씨가 병원에 이송되기까지 약 4시간의 공백이 있던 셈이다. 이 사이 한씨는 A씨 집에 한 차례 들렀다 나왔고 B씨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줬다. A씨와 같은 주거지에 살던 B씨는 이날 새벽 4시 47분께 집에 도착했고 3분 뒤 의식이 없는 A씨를 업고 한씨와 병원으로 출발했다. 경찰이나 소방당국에는 신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씨는 응급실 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차를 돌려 병원을 벗어났다. 이후 그는 A씨의 사인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휴대폰으로 ‘부검 시간’, ‘타살 시 장례절차’ 따위를 검색하기도 했다.

경찰은 사건 4일 만에 한씨를 긴급체포했지만 그가 범행을 강하게 부인하고 청산가리 구입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또 한씨가 유치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해 두 달간 정신병원 입원 치료를 받으며 수사 속도는 더뎌졌다. 한씨는 청산가리 관련 증거가 나온 뒤인 같은 해 9월 2일 다시 체포됐다. 한씨의 휴대폰 2대와 컴퓨터 2대를 포렌식한 결과 그가 청산가리 구입 메일을 보내고 청산가리 살인법을 검색한 내역이 나왔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한씨와 B씨는 2014년 2월께 초교 동창 모임에서 만난 뒤 3월부터 내연 관계를 시작했다. 한씨의 만행은 같은 해 9월부터 A씨가 숨지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는 B씨와의 대화 내용을 A씨에게 일부러 흘리며 내연 관계를 알게 했고 심부름센터를 시켜 촬영한 불륜 사진을 A씨 자택으로 보냈다. 불륜 사실이 알려진 뒤 B씨는 한씨에게 결별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씨는 A씨 집을 찾아가 헤어지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별 통보 하루 뒤 한씨는 A씨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고 말하고 실제 행동에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한씨의 어머니는 B씨를 찾아가 ‘한씨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낙태했으니 책임지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A씨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을 전제로 3억 5000만원을 한씨에게 보냈고 “모든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도 받았다. 그럼에도 B씨와 한씨는 내연관계를 다시 이어갔다.

A씨는 오랜 기간 끝에 얻은 딸을 생각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B씨의 방관과 한씨의 악랄함이었다. A씨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딸을 위해 잘 살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A씨가 숨진 뒤 B씨 또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한씨의 범행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등 혐의가 없다는 처분이 내려졌다.

재판에 넘겨진 한씨는 “사건 당일 피해자의 집에서 그와 소주를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소주에 청산가리를 타지 않았다”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할 목적으로 청산가리를 구입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씨가 피해자의 납치를 모의하거나 피해자를 험담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수십 차례 보내는 등 살해할 만한 동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1심은 한씨가 극단적 선택 시도 이후 ‘청산가리 타살‘ 등을 여러 차례 검색한 것을 언급하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 위해 청산가리를 구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씨의 복구된 휴대전화 메모에서도 범행 계획은 상세히 기록된 상태였다.

한씨 측은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거나 B씨가 A씨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도 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심은 피해자가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던 것과 사망 시각을 추정한 결과 B씨가 A씨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1심은 “피고인은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해 실행에 옮겼음에도 B씨가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등 믿기 어려운 주장을 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륜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살인으로 동기가 불량한데다 피해자의 어린 딸은 한순간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다. 피고인은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징역 25년 선고했다.

한씨와 검찰 측은 쌍방 항소했고 2심이 무기징역을 선고한 뒤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며 형이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