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촉발한 ‘3일 천하’ 쿠데타 [그해 오늘]

by김혜선 기자
2023.08.19 00:00:05

[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보수파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실각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건강문제 때문에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하고 겐다니 야나예프를 임시 대통령에 임명했다. 공산당 산하 관영 언론을 제외한 모든 신문의 발간이 금지됐고, 이날 오전 7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선언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탱크 위에서 연설하는 보리스 옐친. (사진=로이터/브리태니커 사전)
바로 전날인 1991년 8월 18일 고르비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핵심 분쟁지인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 쿠데타 세력이 들이닥쳐 ‘정권을 넘기라’는 요구를 받았다. 고르비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 상태로 별장에 갇히게 됐다. 쿠데타 중심 세력은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루치코프, 부통령 야나예프 등 8명이었다.

공산당 보수파가 쿠데타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고르비가 단행한 개혁 정책에 불만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끝없는 군비 경쟁을 벌이며 냉전 체제를 유지해오다, 1989년 12월 미국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와 고르비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공식적인 냉전 종결을 선언했다. 고르비는 공산주의 체제에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하는 내용의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연방 정부의 독립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산당 보수파는 고르비가 추진하려 했던 느슨한 형태의 ‘신 연방조약 체결’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소련인들은 보수파의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고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 때 개혁파 정치인이자 러시아 SFSR의 최고회의 주석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나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에 힘을 실었다. 당시 옐친은 소비에트 의사당 앞에서 탱크에 올라서서 쿠데타의 부당함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우리는 그들이 동원한 ‘힘에 의한 이러한 조치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이라며 배치된 군인들에게는 “쿠데타 조직의 개가 되지 말라”고 호소했다.



갑작스러운 쿠데타에 전 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언론이 고르비의 실각에 주목하며 연일 소식을 다뤘다. 고르비의 생사에 대한 여러 우려와 함께 쿠데타에 대한 세계적 비판도 쏟아져 나왔다.

보수파는 예상 외 민중의 거센 반발에 크게 당황했고, 쿠데타 3일째인 8월 21일에는 군 장갑차와 시위대의 바리케이트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민중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결국 이날 보수파 세력은 국방장관 명의로 모스크바에 있는 모든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대부분 체포되고, 일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8월 쿠데타’로 명명된 이 일은 소련의 해체에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게 됐다. 연방 정부의 잇따른 독립 요구로 힘을 잃어가던 소련은 단번에 정치력과 장악력을 잃게 됐다. 결국 그 해 12월 8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소련 주요 3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협정에 서명하고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