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카리스마 넘치고 정 많던 강수연
by박미애 기자
2022.05.08 00:01:00
3살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 시작
한국배우 최초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한 '1세대 월드스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카리스마 넘쳤던 팔색조 배우
BIFF 공동 집행위원장 맡는 등 영화계 대소사 챙겨
[이데일리 박미애 기자] ‘한국 영화계의 대모’,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 7일 타계한 고 강수연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로 이 같은 수식어들이 부족함이 없었다.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 한국배우 최초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이라는 역사를 쓴 주역이었다. 배우로서뿐 아니라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영화계의 부흥 및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고인은 한국영화의 성장과 함께하며 장르, 매체에 관계없이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많은 후배 연기자들에 귀감이 된 배우였다.
3세였던 1969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연기를 시작한 고인은 TBC 전속배우로 ‘똘똘이의 모험’(1971) ‘별 3형제’(1977)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해 아역스타로 유명해졌고, 드라마 ‘고교생 일기’에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역시 하이틴 스타가 겪는 성장에 대한 고민과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연기에 진지해진 이후부터는 독보적인 행보를 펼쳤다.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자신의 색깔을 바꿀 줄 아는 팔색조였고 이를 통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배우였다. 베니스영화제에 이어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그야말로 첫 월드스타의 탄생이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에 한국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고, 한국영화에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져 있음을 몸소 보여줬던 배우”라고 고인을 말했다.
고인은 이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장미의 나날’(1994),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송어’(1999) 등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에 두루 출연하며 대표작들을 남겼다. 각 영화들은 그 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작품들로 이름을 남겼다. 그 만큼 작품을 선택하는 그의 안목은 뛰어났고 그의 연기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여인천하’ 속 강수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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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는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안방극장에 복귀했다. ‘여인천하’는 2001년 초부터 2002년 중반까지 무려 1년 반 이상 방송된 SBS의 대표 대하사극이다. 기획 및 방영 초기에는 50부작으로 편성됐으나 전국민적 인기에 힘입어 150부작으로 종영했다. ‘여인천하’는 당시 최고 시청률 35.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강수연은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 경력 최초로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고인은 꾸준히 연기활동을 이어왔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를 했다. ‘달빛 길어 올리기’(2011), ‘주리’(2013)에서 주연을 맡았고 ‘한반도’(2006), ‘영화판’(2012)에서는 조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촬영 현장에서는 스태프와 무명 배우들까지 챙기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유명했다. ‘한반도’로 고인과 함께 작업한 강우석 감독은 “어려운 후배를 만나면 베풀 줄 아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015) 속에 나오는 명대사인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가 없냐”는 힘든 후배들을 다독이며 했던 고인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고인은 영화계 대소사에도 직접 나섰다.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산업을 지키기 위한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선포식에 강제규 감독, 배우 안성기, 박중훈 등과 함께 참여했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은 시기는 세월호 참사 당시 제기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으로 영화제가 존속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고인과 부녀 같은 관계를 이어온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은 “배우로서 카리스마뿐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과 단독 집행위원장을 지내며 조직을 이끌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난 배우였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존재감이 있던 고인이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큰 손실이다. 고인의 장례가 영화인장으로 결정된 것도 한국영화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다.
고인은 지난 5일 오후 6시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가족의 신고로 출동한 119구급대에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원에서 뇌출혈 진단을 받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치료를 받다가 7일 오후 3시께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에 마련되며 8일부터 조문을 받는다. 장례위원장은 김동호, 장례고문은 김지미 박정자 박중훈 손숙 신영균 안성기 이우석 임권택 정지영 정진우 황기성이 맡는다. 발인은 오는 1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