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 남았다고요?”…제주변호사 살인교사 피의자 송환되다 [그해 오늘]
by이재은 기자
2023.08.20 00:00:00
무죄→징역 12년→파기환송→무죄
‘그알’ 제작진 협박 혐의로 징역 1년6월
제주 변호사 피살 21년 만에 ‘자백’ 등장
살인교사 취지 주장, 이후에는 진술 번복
“돈 준다고 해 방송사와 통화했을 뿐이다”
[이데일리 이재은 기자] 2021년 8월 20일 제주경찰청은 도내 장기 미제 사건인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의 피의자 김모씨를 송환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에서 피해자인 이모 변호사(당시 45세)의 살인을 교사했다는 취지로 주장했고 이를 본 경찰이 재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이 사건 공소시효는 2014년 11월 5일 자정에 만료되는 것이었지만 김씨의 사례는 조금 달랐다.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른 김씨는 2019년 10월 ‘그알’ 제작진들과 만나 이 변호사 피살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 사건 발생 20여년 만에 등장한 것일까.
| 제주 지역 장기미제 ‘이 변호사 피살 사건’ 피의자 김씨가 27일 오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제주동부경찰서에서 호송차에 오르기 전 뒤돌아 서 취재진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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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피해자인 이 변호사는 1999년 11월 5일 새벽 제주시 삼도2동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 세워진 승용차 운전석에서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 관통에 의한 과다출혈이었지만 일반적인 흉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수법이 잔인했다는 점에서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추측이 제기됐다.
경찰은 40여명 규모로 수사를 개시했지만 범인에 대한 증거나 단서가 나오지 않아 1년여 만에 본부를 해체했다. 이렇게 이 변호사의 죽음이 영구미제로 남는 듯한 순간 김씨가 21년 만에 등장하며 사건에 이목이 쏠렸다.
김씨는 2020년 6월 27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자신이 제주지역 조직폭력배인 유탁파의 전 행동대원이었고 1999년 10월 당시 유탁파 두목이던 백모씨로부터 범행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어서 손을 봐야 하는데 다리에 한두 방 혼만 내라”는 ‘오더’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김씨는 이를 바탕으로 범행 계획을 세워 조직원인 손모씨에게 전달해 이 변호사가 살해됐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이 변호사의 살인을 교사했다고 드러낸 셈이다.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경찰은 김씨가 해외에 체류한 기간만큼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김씨는 공소시효 만료 전 여러 차례 국외를 드나들었는데 각 체류 기간을 공소시효(2014년 11월 5일)에 더하면 개정 형사소송법(태완이법) 시행일(2015년 7월 31일) 이후가 된다. 즉 태완이법에 따라 시행일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남은 상태가 되기에 ‘살인사건 등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 효력이 발생한 것이다.
또 경찰은 김씨가 ‘그알’과 인터뷰한 내용이 자백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캄보디아에 있던 그를 제주로 압송했다. 살인교사 혐의로 검찰에 넘겨진 김씨는 “직접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당시 용의 선상에 이 변호사 가족이 오른 만큼 방송에 출연해 유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유족으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국내로 들어오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 2021년 8월 27일 김씨가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제주동부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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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김씨가 구체적인 범행 지시를 내리는 등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해 공모공동정범 법리를 적용한 뒤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지난해 2월 김씨의 살인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고 ‘그알’ 제작진을 협박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 증명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재판부는 “피의자 진술 외 별다른 추가 증거가 없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상당 부분은 단지 가능성과 추정만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부분에 해당한다”고 봤다. 다만 김씨를 향해 “법률적 판단이 무죄라는 것”이라며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검찰은 양형 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했고 2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김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협박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단도 유지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 당시 특별 제작된 흉기가 사용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며 “조직폭력배인 피고인이 위해를 가하고 사주를 받은 후 적어도 미필적 고의를 갖고 피해자를 사망케 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지난달 26일 이 변호사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김씨가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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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1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위한 충분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최초 범행을 지시했다는 백씨는 당시 수감 중이었고 직접 피해자를 살해한 손씨를 어떻게 도피시켰는지에 대한 진술은 모순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했다. 김씨의 진술이 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함께 ‘피고인 본인 진술’이라는 간접증거만 있는 상태에서 진술의 주요 부분과 맞지 않는 객관적 사정이 드러났다면 섣불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광주고법은 지난달 26일 김씨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검사 측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살인의 고의나 공모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이날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들과 만나 “제 한마디 말로 피해자들이 또다시 고통받았을 생각을 하니 죄송스럽다”며 “이 사건 단초가 저인 것은 인정한다. 그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형을 살라고 하면 하겠다. 하지만 말 한 번 잘못한 죄로 10년 넘게 징역형을 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아울러 “다른 사람에게 제보를 받은 방송사 측이 제게 먼저 연락했다. 돈을 준다고 해 방송사 측과 통화했을 뿐”이라며 “방송사 측은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는 이유로 나를 범인으로 몰았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명예훼손과 위자료 소송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