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서재 여자의 서재, 그 오만과 편견[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7>

by오현주 기자
2021.10.23 00:01:01

▲메시나·미첼·카브레라 그림으로 본 남녀의 '서재'
남성 전유물로 여겨진 서재, '성 제롬' 그림 대표적
女수학자 히파티아…학식 높았지만 마녀몰려 최후
예속 삶 거부한 소르 후아나…수녀원서 서재 쟁취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1474년경 그린 ‘성 제롬’(St. Jerome). 15세기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화가 메시나는 종교화·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미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화풍은 그가 어린 시절 플랑드르 미술을 접한 영향으로 본다. 여기에 공간배치에 공을 들이고 사실적 묘사를 추구하는 이탈리아 미술을 결합해 그만의 독특한 경향을 창조해낸 것. 영어이름인 ‘제롬’ 대신 서재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성인이란 뜻을 담아 ‘연구실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라고도 불리는 작품은 화가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를 구현한 공간에 빛의 움직임을 따른 방식으로 그려졌다. 나무패널에 유채, 45.7×36.2㎝,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뭐가 떨어진다는 협박성 속담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요즘 남자 연예인들은 어찌나 요리를 잘하는지. 게다가 외식요리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 이도 남성이고, 요리 경연프로그램에서 채점을 하는 전문요리사도 남성인 세상이다. 남성이 손을 대면 수천년 동안 여성의 영역이던 요리조차도 전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한 가정으로 돌아오면, 아무리 맞벌이 부부라도 가족식사를 책임지는 이는 여전히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부엌은 여성이 더 많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공간은 그 자체로 중성적이지만 부엌처럼 특정한 성별과 연관짓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서재’도 유사하다. 부엌과는 달리 대표적인 남성의 공간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서재는 침해받지 않은 권리를 가지는 사적 공간이다. 거실이나 침실 등에서 분리돼 나온 서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미 중세의 끄트머리인 14∼15세기, 궁전 혹은 부르주아의 가옥에서 발견됐는데, 대체로 가장인 남성이 홀로 자신의 독서와 집필, 사색의 공간으로 활용했고 열쇠로 채워 다른 가족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과거 그림들 속에서도 책에 둘러싸여 머리를 싸맨 채 글을 쓰거나 지구본을 놓고 세계의 원리를 고민하는 주체는 남성이었다. 자신만의 서재에서 책상에 앉아 있는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 중 하나는 성 제롬(St. Jerome·347?~420)이다. 그는 수십년간 구약성경을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해 서방세계에 기독교 교리를 안착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사제였다. 번역사전이 있을 리 만무했던 서기 1세기에 일반인은 다 읽기도 어려운 구약성경의 내용을 번역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학식을 필요로 했을 테고, 이러한 필생의 업적 때문에라도 그의 모습을 그리는 데는 책상이 있는 서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1430?~1479)가 그린 ‘성 제롬’(1474년경)은 수도원 안에서 책을 읽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추기경 복장을 하고 있는 그는 아치가 뾰족한 고딕식 건물 안에 있는 서재의 책상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붉은색 추기경의 모자는 책상 뒷선반에 얹혀 있다. 책상의 앞과 옆으로는 책장이 있는데, 한치도 빈틈없이 묘사한 건물의 구조와 인물의 자세에 비해 책장의 책들은 금방 읽고 급하게 얹어놓은 듯 펼쳐져 있다. 번역이란 이러저러한 자료를 고루 참조해야 가능한 일이라, 화가는 그가 일하는 방식이 이러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주변에 그를 방해하는 것들은 없으나, 여러 동물이 그림 속에 배치돼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그의 발치를 따라가 보면 두 개의 화분 앞에 회색 고양이가 얌전히 앉아 있고, 화면 앞쪽에는 새 두 마리가 두드러져 보인다. 또 멀리 오른쪽 회랑에서는 그림자에 가려진 검은 동물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건물 안에서는 키울 수 없는 동물, 사자다. 성 제롬이 사막에서 수도하던 시절, 발에 가시가 박혀 괴로워하는 사자의 가시를 빼줘 살렸고, 그 사자가 평생 그의 곁을 따랐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도상이다. 그래서 어느 그림에서 책상에 앉은 남성 곁에 뜬금없이 사자가 보인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 제롬인 것이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성 제롬’(St. Jerome) 중 부분.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동물 상징 중 사자를 클로즈업했다. 성 제롬이 수도시절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 살려줬고, 그 사자가 평생 그의 곁을 따랐다는 일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성 제롬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라면 히파티아(Hypatia·355∼415)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던 그는 여성이다. 17세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공전의 곡선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발견해 천문학의 혁명을 이뤘다면, 그보다 1400년 먼저 이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히파티아였다고 알려져 있다. 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고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학식을 쌓았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교수기도 했던 히파티아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마녀로 몰려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몽땅 뽑히고, 옷이 벗겨진 채 날카롭게 간 조개껍데기로 베어낸 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종국에는 화형으로 일생이 끝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히파티아의 학문적 업적은 후대에도 남겨져,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가 바티칸성당 내 교황의 개인서재 벽에 그린 ‘아테네학당’(1510∼1511)에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여러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그려져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히파티아의 일생에서 화가들이 가장 그리고 싶어했던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보다는 벌거벗은 최후의 모습이었을까. 영국 화가 찰스 윌리엄 미첼(1854∼1903)이 그린 ‘히파티아’(1885)는 벗겨진 맨몸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리며 온몸으로 뭔가를 호소하는, 극도로 당황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인류사에 남긴 학문적 업적, 비극적인 죽음을 그려내는 데 미첼이 그린 희고 늘씬한 맨몸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고초를 겪다니 안타깝다는 것 이외에 이 그림이 학자로서의 히파티아에 대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찰스 윌리엄 미첼의 ‘히파티아’(Hypatia·1885). 인류 역사에서 식별 가능한 인물 중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꼽히는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을 그렸다. 히파티아의 죽음이 ‘자유로운 고대 학문이 지고 중세 암흑시대를 예고한 사건이 됐다’는 분석 외에,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히파티아를 이미지화한 남성 중심 시각은 왕왕 도마에 올랐다. 캔버스에 유채, 244.5×152.5㎝, 영국 뉴캐슬 랭아트갤러리 소장.


현대 이전에는 여성의 공교육이 제한됐고, 최근까지도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 또는 빈부격차로 인해 여성은, 교육은 물론 정상적인 사회활동마저 불가능한 지역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따로 방법을 찾은 여성이 있으니, 교회에 수녀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결혼에 따른 제약을 피해 독신의 삶을 살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흔치 않은 직업이 수녀였던 것이다.

17세기 스페인 식민지였던 멕시코에서 수녀의 삶을 선택한 후아나 이네스 델라 크루스(1648∼1695)는 뛰어난 저자고, 시인이며, 작곡가였다. 일명 소르 후아나로 불리는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지속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남장을 해서라도 대학에 입학하고자 했다. 그러한 무모한 시도가 좌절되자, 한 가정에 예속된 삶을 거부하고 역설적으로 좀더 자유로운 학문과 활동이 가능한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소르 후아나를 담은 그림은 여러 점 남아 있지만 사후에 그려진 것으로 멕시코 화가 미구엘 카브레라(1695∼1768)의 ‘후아나 이네스 델라 크루스의 초상’(1750년경)이 있다.

미구엘 카브레라의 ‘후아나 이네스 델라 크루스(Sor Juana Ines dela Cruz)의 초상’(1750년경). 존경받는 멕시코 수녀이자 뛰어난 학자로 꼽히던 후아나 이네스 델라 크루스를 그렸다. 한 손은 묵주를 쥐고, 다른 손은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작 외에도 앞을 향해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눈빛에서 당당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캔버스에 유채, 70×50㎝, 멕시코 멕시코시티 역사박물관 소장.


흥미로운 점은 서재에 앉아 있는 초상이란 것이다. 이 그림에서 소르 후아나는 수녀복장을 하고 있지만 사제의 보조로서가 아니라 거대한 서가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집필을 하는 책상 앞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후대의 문학가 버지니아 울프는 소르 후아나가 매우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데 성공했던 여성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재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생각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성만의 공간이었다. 대개 남성 문필가들이 자기만의 서재를 당연하게 가지고 있던 데 반해,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처럼 잘 알려진 여성작가들조차 공용 식탁이나 좁은 다탁을 집필공간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흑인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도 결혼 이후 음식물이 덜 치워진 식탁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니. 과연 언제쯤 여성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서재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여성 역시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