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용 전 판사, '사법농단' 무죄 확정…"치욕의 순간 지나왔다"(종합)

by한광범 기자
2021.10.15 00:01:01

사법농단 기소 법관 대법 첫 판결…"죄 안된다"
수사단계부터 법원 일관된 입장…檢 무리수 수사
법관 재직시 검토보고서 유출에 ''절도죄''까지 적용
유해용 "만감 교차…檢 여론몰이로 고립무원 경험"

유해용 전 부장판사.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대법원 재판연구관 재직 시절 연구자료를 퇴임 시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과 절도 등의 혐의로 기소됐던 유해용 전 부장판사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첫 대법원 판단이다. 유 전 부장판사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은 치욕의 순간’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4일 공무상비밀누설·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절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유 전 부장판사에 대해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유 전 부장판사는 법관 퇴임 시 재판연구관 시절 작성한 검토보고서 등을 가지고 유출해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절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유 전 부장판사가 정당한 권한 없이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가 기재된 검토보고서 등을 유출했다. 검토보고서 등은 대법원 업무 목적 범위에서만 사용·소지가 허용돼 있다”며 공공기록물관리법 등의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1·2심에 이어 대법원도 “유 전 부장판사가 검토보고서 등을 유출했다고 인정할 증거도 없고, 유출이 인정되더라도 공공기록물에 해당하지 않고 개인정보유출도 아니며 법리상 절도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유 전 부장판사가 수석·재판연구관 시절 검토했던 사건을 퇴임 후 변호사로서 수임해, 검찰이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부분에 대해서도 “변호사법이 말하는 ‘직무상 취급하거나 취급하게 된 사건’은 직무상 직접적·실질적으로 처리하거나 처리할 수 있게 된 사건에 제한된다”고 무죄 판결했다.

아울러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의료진이었던 김영재씨의 특허소송 관련 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공무상비밀누설)에 대해서도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 전 부장판사 사건은 사법농단 수사 초기 법원과 검찰이 거세게 충돌했던 대표적 사례였다. 검찰은 유 전 부장판사가 재직 당시 확보한 검토보고서 등의 파일을 퇴임 시 가지고 간 것은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이자 절도에 해당한다며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이를 수차례 기각했다.





이에 검찰은 “(법원의 압수영장 기각으로) 심각한 불법상태를 용인하고 증거인멸의 기회를 주는 결과가 돼 대단히 부당하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후 검찰은 2018년 9월 유 전 부장판사에 대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전·현직 법관 중 첫 사례였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도 기각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당시 영장전담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360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각 사유를 통해 검찰 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전 압수영장 기각 사유와 마찬가지로 검찰이 적시한 사실만으로는 애초에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통상적으로 한두 줄에 그치는 영장 발부·기각 사유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허 부장판사는 “영장청구서 기재 피의사실 중 변호사법 위반을 제외한 나머지는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등 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존재한다”며 “피의사실과 관련된 문건 등을 삭제한 것을 들어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를 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변호사법 위반 부분 역시 공무원으로 재직 당시 피의자의 직책·담당 업무의 내용 등에 근거한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는 점, 이 부분 관련 증거들은 이미 수집돼 있는 점 및 법정형 수위를 고려할 때 구속의 사유나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법원의 판단에 검찰은 즉각 반발했다. 검찰은 당시 “구속사유를 부정하기 위해 만든 기각을 위한 기각 사유에 불과하다”며 “사법농단 사건에 있어서는 이런 공개적·고의적 증거인멸 행위를 해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 전 부장판사에 대한 1·2심과 대법원 재판에서 법원의 판단은 당시 영장 기각 사유와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법원이 수사 단계부터 일관되게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던 사건”이라며 “검찰이 무리하게 유 전 부장판사를 옭아매려한 점이 인정됐다”고 밝혔다.

유 전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결 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드디어 피고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대법원 소법정에 피고인으로 출석하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소회를 적었다.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충격과 공포로 눈앞에 캄캄하던 순간,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은 치욕의 순간, 울분으로 스스로를 해치던 시간, 그리고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체념의 시간을 지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이어 “(수사 당시) 검찰의 대대적 여론몰이로 인해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린 심리상태(였다)”며 “저의 안위를 걱정하고 저를 믿어준 많은 분들의, 체온이 담긴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는 저를 지탱하고 회생시키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