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밥 한그릇의 권리 찾기..지금부터 시작”

by이지현 기자
2012.05.23 06:01:00

은수미 당선자..여성·청년·비정규직에 관심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가, 국회의원으로 변신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5월 22일자 20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4·11 총선에서 정당별 비례대표 후보자가 발표되던 지난 3월 고용노동부는 술렁였다.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3번으로 배치된 은수미 박사 때문이었다.

정부의 노동 정책이 나올 때마다 허점을 지적하던 은 박사는 한마디로 고용부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20번대도 아닌 3번을 부여받았다. 이미 당선자라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에 고용부로서는 당연히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총선을 치르고 이제는 당선자 신분으로 만난 은 박사는 21일 이같은 얘기를 전해듣더니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저는 급진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 은수미 민주통합당 당선자가 22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이뤄진 이데일리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김정욱 기자)

 
은 당선자는 어릴 때부터 노동과 거리가 멀었다. 수영을 하고 싶으면 집 주변의 실내 수영장에 가고, 공연을 보고 싶으면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특히 발레 ‘지젤’ 공연이 있을 때면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을 매번 쫓아다니며 전체 극 전개를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방면의 문화생활을 누리던 소녀였다.

대학에 진학한 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전공인 사회학과 선후배들은 ‘미대나 음대에 갔어야 할 사람이 물을 흐리고 있다’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던 어느날 동급생이 투신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사람이 떨어졌는데 전경은 오히려 최루탄을 퍼부었어요. 친구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을 뒤로 한 채 무서움에 몸을 떨며 정신없이 뛰었죠. 한참 뛰고 나서야 부끄러움이 몰려오더라구요.”

그는 이후 6개월 동안 끙끙 앓았다. ‘지식인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죠. ‘영혼에 검은 리본을 달았다. 이 마음으로 간다’라고 말했어요. 노동운동에 입문한 계기랄까요. 이후 언제나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2개월 동안 재봉틀을 배워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미싱사로 취업했다. 미싱 작동법만 알고 취업했으니 주변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낮이면 육두문자가 날라다니고, 밤이면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공장에서는 미싱보조(시다) 폭행 사건도 연이어 터졌다. 충격을 충격으로 뒤덮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살 꼬마가 무단결근을 했는데, 다음날 관리자들이 공장 직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아이를 구두발로 밟더군요. 본보기였던 거죠. 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요.”

미싱사로 1년6개월이 지났을 즈음 그는 노동운동을 시작하다 구속됐다. 출감한 후 남한사회주의자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하고 백태웅, 조국 교수, 박노해 시인과 활동하다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강릉교도소의 6년 수감 생활 가운데 4년6개월은 창문도 없는 독방 신세였다.

“출감한 후 검은 리본을 뗐다고 생각했어요. 사회 발전에 따라 저같은 사람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죠. 그런데 이번 정부 들어 ‘다른 방식으로 할 일이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뭐에요. 하하.”
 
 

▲ 은수미 당선자가 비정규직 감축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정욱 기자)
지난 2008년 이영희 당시 노동부장관은 ‘비정규직 100만 해고 대란설’을 제기했다. 2010년 2년 규정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느냐 아니면 해고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만큼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며 ‘사용 기간 4년 연장안’을 들고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100만명이 해고됐어요. 그래서 금융위기가 다시 닥치면 어떤 파장이 생길까를 두고 면밀하게 분석했죠. 하지만 그런 결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정부가 법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선동에 나서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죠.”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서 소신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노동부의 개정안이 허황된 논리라고 주장했다. 후폭풍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대외 활동 금지령이 내려졌고 내부 인사고과에서 최저점을 받았다.
 
동료에게도 탄압이 이어졌다. 150명에 이르던 연구원은 80명으로 줄었다. 은 당선자 옆방을 사용하던 김경한 연구위원은 간암이 발견돼 5개월만에 세상을 등졌다.

“노동운동을 할 때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는 희생과 결단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 정신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599만5000명으로 임금 근로자 1751만명의 30%를 넘는다. 파견, 하도급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욱 늘어난다.

“MB 정부는 노동 정책이 없는 정부입니다. 있어 봐야 일자리 정책이 고작입니다. 노동 정책과 일자리 정책은 분명히 다르죠. 헌법은 일자리권이 아니라 노동권을 규정하고 있어요. 일자리 몇개만 있고 노동 정책은 없는 거죠. MB 정부는 기본이 빠진 거죠.”
 
 
은 당선자는 노동 문제의 핵심을 3가지로 정리했다. 청년 일자리 창출, 여성 고용률 제고, 비정규직 감축. 그 가운데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방점을 찍었다.

“우리나라는 정책 효과가 큰 나라에요. 정부가 정책을 일관되게 끌고 나가면 5년 이내에 비정규직 규모를 상당수 줄일 수 있습니다. 재원과 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청년인턴 없애고 정규직부터 시작할 수 있게 정책을 추진하면 가능성이 분명 있습니다.”

그는 특히 사각지대에 놓인 하도급 문제를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봤다.

“정권이 바뀌면 무조건 해결해야 해요. 정권이 바뀌지 않더라도 대책을 만들어야 해요. 이것은 좌우, 아니 정당을 불문하고 당당하게 물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현 상황을 지속시켜야 하느냐, 젊은이를 파견직으로 내몰아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부처별, 초당적 해결 방안이 필수적입니다.”

은 당선자는 노동 현안의 해법을 밥상이론에 비유했다.

“밥상에 밥이 5그릇, 숟가락이 6개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릇을 늘리자고 얘기하고 싶어요. 모두가 밥숟가락을 올리게 만들어야죠. 나눠먹기는 원하지 않아요. 각자 한그릇의 권리는 있는 거잖아요.”

그는 그릇을 늘리며 누구에게 먼저 밥을 줄까도 앞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과 여성, 비정규직을 그 누구보다 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는 방안이다.

“청년이 바로 서야 미래가 섭니다. 20·30대에게 일자리가 있어야 이들이 40~50대에 접어들어 꿈을 실현하지 않을까요. 분명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꾸 두드리면 언젠가 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 문제 전문가로 이름이 높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시위를 벌이다 제적됐다.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백태웅, 박노해 등과 함께 구속돼 6년 동안 복역했다. 서울대에 복학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운동론 강의를 맡아 비정규직 문제를 강의했다. 또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비정규직 관련 연구서를 쏟아냈다. 2012년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비정규직과 한국 노사관계 시스템 변화 1,2’, ‘고용유연화와 비정규 고용’, ‘IMF 위기’ 등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