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희의 톡톡아트]오이디푸스가 제 눈을 찌른 까닭은?
by유경희 기자
2012.03.23 12:10:00
[이데일리 유경희 칼럼니스트]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누구를 꼽을 것인가? 아마도 서슴지 않고 오이디푸스를 떠올릴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는다. 물론 어머니인줄 모르고 저지른 일이다. 물론 그의 죄를 무지탓으로 돌린다고 해도 죄는 죄이다. 더군다나 삼거리에서 만나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고 채찍을 내리치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참아내지 못하고 죽인 일도, 어찌 보면 자기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오이디푸스의 ‘인격적 결함’(그리스어로 하르마티아 harmatia) 탓인지도 모른다.
| | ▲ Antoni Brodowski,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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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웃나라 왕비와 결혼하고, 그녀가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저지른 근친상간의 치명적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취한 방법은, 거세도, 자살도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왜 실명을 선택한 것일까?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푸는 아주 중요한 열쇠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우리들처럼 숨 쉰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다는 것’이었다. 또 죽는다는 것은 ‘시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을 보려면 그들의 언어습관을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돌아가셨다’고 말하거나, ‘숨을 거두었다’ 혹은 ‘하늘나라로 갔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보통 “그는 마지막 눈길을 거두었다”고 표현한다. 고인이 더 이상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슬퍼하는 것이다.
| | ▲ Charles Francois Jalabeat,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를 이끄는 안티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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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아주 현세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헤게소 묘비(기원전 410-400년)의 부조를 보면, 산자(시녀)와 죽은자(주인여자)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주인여자는 하녀가 건네주는 보석함에서 목걸이 하나를 빼어볼 뿐,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이집트미술이나 기독교미술에서는 천국이나 지옥, 심판 장면을 많이 보여주는데 비해, 그리스 미술에는 이러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삶을 누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의 빛밝음의 세계를 눈으로 감지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여행할 때 우리는 무엇에 매료되는가? 마치 태양의 신을 배출한 나라답게 얼마나 햇빛이 명랑하고 밝으며 생생하던가! 그 태양 아래 신격화된 인간, 인격화된 신들의 조각상들은 또 얼마나 숭고하고 우아하던가? 그러니까 그리스 미술만큼 신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말한 첫마디 “보기에 좋더라”의 미술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없어 보인다.
| | ▲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오이디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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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우리말로 하면 ‘백문이 불여일견’ 쯤으로 번역되는 이 아포리즘은 고대 그리스 이후로 지금까지 서구인식의 역사 즉 철학의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이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그리스 고전에 대한 복귀를 부르짖던 르네상스시대에 발견된 원근법이야말로 내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의 세계를 나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듯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인에게 실명은 거세보다 더 충격적이고, 자살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하는 존재, 죽음보다 더 끔찍했던 산송장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상태로 오이디푸스는 딸이자 여동생인 안티고네와 긴 유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오이디푸스는 눈을 잃고 난 후 오히려 차분하게 내면의 신성한 소리를 듣는 일이 가능해지지는 않았을까?
그러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바로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 브뉘엘이 만든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의 눈을 면도날로 베는 장면! 그 역시 보는 것이 중심이 된 서구 인식의 역사를 전복시키는 것인 동시에, 보아서는 안될 장면 즉 금기된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눈(시선)에 대한 단죄의 의미가 함축된 것이라고 한다.
| | ▲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1929).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함께 만든 작품으로,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잘라내는 공포어린 장면으로인해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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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년간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고, 뉴욕대에서 예술행정 전문가과정을 수료하였다. 저서로는 [예술가의 탄생], [테마가 있는 미술여행] 등이 있다. 현재 대학원 최고위과정과 대기업, 공기업 등에서 하이브리드적인 미술강좌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