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빚 권하는 정치인들

by이정훈 기자
2012.02.16 10:20:00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2월 16일자 31면에 게재됐습니다.

[뉴욕= 이데일리 이정훈 특파원] 미국에서 살다보면 `소비가 미국경제의 70%를 책임진다`는 말을 절감할 정도로 `지갑을 열라`는 온갖 유혹에 시달린다.

이제 미국 땅에 자리잡은지 7개월 남짓 됐건만 추수감사절부터 블랙 프라이데이, 사이버 먼데이, 크리스마스, 신년, 슈퍼볼, 발렌타인데이까지 무슨 할인행사가 이렇게도 많은지. 다음주 프레지던트 데이 세일광고도 벌써 TV에 넘쳐난다. 값싼 음식부터 자동차, 심지어 집까지, 할인대상도 너무나 다양하다.

그러나 작년 말과 올초 각종 지표에서 확인되듯 미국인들의 형편은 그다지 넉넉치 않다고들 한다. 고용은 좀 살아난다지만 아직 임금 상승까지는 갈 길이 멀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에 빚이나 외상보다는 현금을, 소비보다는 저축을 좀 더 선호하는 모습이다. 은행들도 아직까지는 공격적으로 대출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도 부진한 소비와 주택경기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모기지 리파이낸싱 규제를 풀어주는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쉽게 풀면, 우리의 주택담보대출과 비슷한 모기지대출을 아주 낮은 이자로 쉽게 갈아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게 골자다. 이때 발생하는 목돈은 가계에 고스란히 여윳돈으로 남게 된다. 이래서 모기지 리파이낸싱 대책은 혼히 소비부양책으로 이해된다.

선거 이전에 실물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정치권의 다급함이야 십분 이해되는 것이지만, 집값이 대출금 아래로 떨어진 소위 `깡통주택` 소유자나 대출금 미납자 등에게도 이를 허용하는 식의 규제 완화는 다소 위험스러워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부실한 모기지를 기초로 한 각종 파생금융상품들로 인해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바로 이 곳이었다는 걸 잊은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미국과 비슷한 상황이 지금 한국 땅에서도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이반의 위기를 느끼며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우리의 집권여당도 총선 공약으로 총부채상환비율(DTI) 폐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고 한다. 우리의 가계부채 문제도 미국 못지 않은데 말이다. 어찌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인들의 행태는 이리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지난주 다국적 컨설팅사인 맥킨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10개국의 부채수준을 비교한 보고서를 보면 미국과 한국이 지난 2008년 이후 3년만에 국내총생산(GDP)대비 정부와 기업, 가계부채 비율을 16%포인트나 줄여 가장 훌륭한 부채감축(디레버리징) 실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교대상이 된 일본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호주 등에 비해 이 기간중 미국과 한국의 GDP 성장세가 컸다는 점에서 부채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착시가 생겼다는 지적도 있다. 이 비율로만 "이제 빚 문제는 한시름 놨다"고 말하긴 너무나 성급하다는 얘기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교수는 "1980년대 이래로 정치인들에게 대출 규제 완화는 가장 저항이 없는 손쉽고 매력적인 경기 부양과 소득불균형 완화대책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미국과 한국 정치인들의 행보가 이런 셈법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양국 모두 무분별한 `빚 권하기`가 낳은 처참한 결말을 일찌감치 경험했던 나라들이라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