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정원석 기자
2009.03.19 07:30:14
[이데일리 정원석기자]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따른 국채 발행 규모가 18조~20조원 가량으로 제시됐다. 추경 논의가 본격화된 지난 1월 중순 이후 적자국채 발행 확대에 따른 수급 우려로 잔뜩 `찡그렸던` 채권시장은 표정이 다소 펴졌다.
추경용 국채발행 규모가 예상치(최대 30조원 이상)를 크게 밑도는 수준으로 발행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시장의 물량소화 부담이 경감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해 지난 17일 이후 국고채 3, 5년 금리는 각각 10~15bp 가량 하락(채권값 상승)했다.
물량 소화가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하며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국채 발행분을 인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던 것에 비교하면 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기사는 18일 오후 4시56분 이데일리 유료 서비스인 `마켓 프리미엄`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추경 편성과 관련돼 진행됐던 논의를 비판적으로 돌이켜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통화당국의 발권력 동원에 대한 부작용을 너무 간과했다는 것이다.
시장과 정부가 한은이 나서야 한다며 제시한 논거는 “추경용 국채발행으로 인한 시장의 수급불안이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져 국민의 경제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한 한국은행 관계자는 “모기지 금리가 국채 장기물 금리와 연동된 미국에서는 장기채 금리가 국민 경제활동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 CD등 단기금리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CD금리는 지난 10월 이후 한은의 연속적인 기준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에 영향받아 사상최저인 2.43%까지 내려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출금리는 대부분 CD금리에 연동되기 때문에 장기금리가 서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파급은 제한돼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각종 대출 중에서 국고채 3, 5년 금리에 연동되는 것은 학자금대출 정도에 불과하다.
이 관계자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장기채 금리는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금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장기금리 동향에 영향을 받는 경제주체는 회사채 시장에 접근이 가능한 대기업군에 속한 기업 정도”라고 말했다.
때문에 국고채 3, 5년물 등 중장기 채권의 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 보험사 채권매니저는 “채권 발행물량이 늘어나서 금리가 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시장 원리”라며 “이를 인위적으로 정책당국이 억누르려고 한다면 시장구조가 왜곡돼 정상적인 가격결정 매커니즘이 뒤틀리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중장기 금리가 상승할 경우, 보험사와 연기금 등 만기보유를 목적으로 하는 금융기관들의 채권 매수세가 유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로 인해 국고채 3, 5년 금리가 각각 3%대와 4%대까지 내려오면서 이들 기관들은 국채투자 비중을 줄이고 만기시 5~6%대의 이자수익이 보장되는 회사채 투자비중을 늘렸다.
한은 측도 금리 상승(채권값 하락)이 채권시장을 위축시키는 요인이기는 하지만, 통화당국이 발권력을 동원해야 할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금 국고채 금리에 대규모 국채발행 가능성이 반영이 다 되어 있는 것인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면서도 “현재 금리에 그 가능성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면 실제로 국채 발행이 늘어나더라도 큰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채를 한은이 매입하라는 게 '시장'의 목소리로 포장되고 있지만 그게 따지고 보면 '업자'의 목소리”라며 발권력 동원에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냈다.
시중 유동성 상황도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데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1월 광의통화(M2)는 평잔 기준으로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2% 늘어나는데 그쳤다. 협의통화(M1)증가율이 지난 2006년 12월 이후 2년1개월만에 최고치인 8.3%를 기록했음에도 M2증가율은 2007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한 것.
한국은행이 시중에 푼 유동성이 파생되지 않고 단기자금으로 머무는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은 발권력을 동원해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는 것보다는 단기에만 몰려있는 유동성을 장기로 파생시킬 수 있는 매커니즘을 복구하는 것이 더 시급한 상황"이라며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있지만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의 국채 매입은 추경에 따른 국채 발행 증가분으로 인해 시중금리가 폭등하는 등의 `단기 충격`이 나타났을 때로 국한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발권력 남발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태연 동양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한다면 시중유동성 전체가 늘어나는 효과보다는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환율상승 압력을 높이기만 할 것"이라며 "비용과 편익 관점에서 볼 때 시중금리 상승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발권력을 동원해 국채를 매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앞선 한은 관계자는 "추경용 국채 발행으로 인한 시중금리 상승은 확장적 재정정책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비용의 측면이 크다"며 "장기 금리가 상승하더라도 그 속도가 점진적이라면 시장참여자들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