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협상 25시)“협상의 타짜”북한

by박상기 기자
2008.10.16 10:10:00

[이데일리 박상기 칼럼니스트] 최근 미국이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서 제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연일 이에 대한 협상 분석 및 향후 전망에 대한 보고서 및 논평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브 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미국 발 세계 금융 공황 사태, 이라크 전쟁 등 크고 작은 실정들로 얼룩진 부시 정권의 레임덕 현상을 타개하고, 마지막 외교협상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북한측의 부당한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체 실효성도 없는 “핵 불능화 2단계” 합의를 무턱대고 체결했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는 등 참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이미 무수히 쏟아 지고 있는 저 국내외 외교 전문가들의 금번 사태의 분석과 예측에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북한이 과연 합의한 대로 핵 불능화를 제대로 준수할 지 않을 지를 일단 지켜 봐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김정일 정권뿐 아니라 Next 김정일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북한으로선 “핵”이란 협상카드처럼 유용한 카드가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6자회담 합의안이든, 미국과의 단독 합의안이든 따질 것 없이, 언제 또 북한이 새로운 상황 변화를 이유로 금번 합의안을 부분이든 전부이든 번복하고 나올 지, 또 어떤 돌발행동으로 상황변화를 통한 합의 불이행의 이유를 내세우고 나올지를 예측해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난해하고 밑도 끝도 없는 얘기는 접어 두고 잠시 화투판 얘기를 해 볼까 한다. 화투판에서 신기에 가까운 능수능란한 손기술로 사기 도박을 하는 사람을 속어로 “타짜” 라 일컫는다. 이런 타짜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수 타짜들의 기술은 얼마나 뛰어난지 어지간한 타짜들은 두 눈 뻔히 뜬 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고 하니, 점 백 치는 우리 일반인들로선 그 기술을 상상 조차 하기 힘들다.

서양에도 카드로 하는 다양한 도박이 있고, 따라서 그 곳에도 대단한 카드 도박꾼들이 있을 것이다. 한 때 해외 원정 도박이 연일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언뜻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즉, 서양인들의 카드 도박은 수학적 확률게임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들고 있는 패와 상대의 기본 패를 시점으로 자신에게 들어 오는 새로운 패를 갖고서 상대의 패를 끊임없이 확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이 없이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동서고금 막론 하고 협상을 도박에 비유하는 걸 볼 때, 서양인들은 협상을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선호하며, 특히 외교협상을 수치계량적 확률 모델로 예측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에 그토록 매달려 왔는지 모른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천재 수학자로 나왔으며 노벨상을 수상했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쟌 내쉬 박사가 협상을 수학적 확률로 분석했던 선구자였다는 사실과, 필자가 미국 MBA 과정에서 협상 과정을 수학할 때 협상학 교수가 들려주고 보여 준 다양한 협상의 수리적(Mathematical) 시뮬레이션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타짜에겐 그러한 수치적 확률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즉, 카드나 룰렛 게임에 적용되는 운의 확률이란 게 애당초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타짜는 당신의 패를 확률로 예측하는 게 아니라, 일말의 실수 없이 정확하게 자기가 주고 싶은 패를 주고 갖고 싶은 패를 갖고 게임을 하는 고도의 사기 도박꾼이기 때문이다. 타짜는 누구처럼 확률에 돈을 걸지 않는다. 타짜가 믿는 것은 자신만이 식별 가능한 화투를 사용해서 미리 철저히 순서대로 정리한 화투 묶음 그것뿐이다.

금번 핵불능화 협상뿐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과 북한간의 다양한 외교협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미국이 막대한 자본과 고도로 정밀한 확률게임을 하는 거물급 카드 도박사라고 한다면 북한은 한마디로 타짜라고 필자는 잠정 결론짓고 싶다.

실제로 금번 북핵 협상 과정에서 우리는 북한의 “타짜 협상전략”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북한은 통상적인 국제외교협상의 절차를 다분히 무시한 체, 일단 사고부터 저질러 버리는 초기 주도권 확보전략의 효과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푸에블로호 강제 포획, 영변 핵시설을 비밀리에 건설한 후 핵시설 보유 선포,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실험, 적절한 사전 통보 및 국제기구 승인 없이 핵실험 실시, 일본인 강제 납치 억류 등등,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도발을 일단 자행한 후, 그 것을 빌미로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내는 전략은 이미 고전이다.

참으로 비이성적인 처사, 아니 곧이곧대로 표현한다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일본뿐 아니라 미국이란 초 강대국과의 협상에서도 이러한 저질러 놓기 식(기정사실화 전략: Fait a compli) 전략을 통해서 득을 보면 봤지 손해 본 적이 없기에 북한의 충격적 도발 전략은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초기 협상전략이며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전망된다.



일단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들어선 대부분의 국가들, 특히 단기 외교 성과에 급급한 경향이 짙은 미국의 경우, 자신의 강력한 외교 국방력을 앞세워 초기진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많다. 속된 말로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극동지역의 자그마한 불량 테러지원국, 북한. 단독으로든 아니면 주변 국가들과의 공조를 통하든, 어떻게든 적당히 겁주고 얼러 조속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Over-confidence)에 다분히 공격적이고 압박적인 외교협상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부시 대통령의 그 유명한 “악의 축” 발언도 그렇고, 강력한 대북 금수조치도 그렇고, 6자 회담도 어떤 측면에선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겠다. 그러나 이러한 덫에 속절없이 걸려 들 북한은 아닌가 보다.

미국 등 관련 주변국들의 압력과 공세가 거세면 거셀수록 북한의 대응은 오히려 비적극적이다. 회피적이다. 한마디로 그런 고압적인 협상태도나 요구를 견지하는 한 북한은 아예 협상장에 나타나지도 않는 불참불응 전략을 구사한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속이 먼저 바짝바짝 타 들어 가는 쪽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 등 상대 협상국가들이 된다.

북한의 2단계 협상기피 전략 (Avoiding Strategy)인 힘빼기 전략에 에 말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서방의 협상 실무자들이 이러한 북한의 협상기피 전략을 정말 몰라서 당하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구조하에선 어디나 집권당과 야당 그리고 자유언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북한은 반세기를 이어온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족전재독재 체재. 야당도 자유언론도 그 흔한 시민단체 하나 없다. 한마디로 이 문제에서 북한은 어쩌면 자유롭다.

즉, 집권당의 실정을 호시탐탐 엿보는 야권 및 언론에게 이러한 외교문제, 더욱이 자국의 정부가 밀리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그것도 북한 같은 3류 국가에 질질 끌려 가는 듯한 남사스런 모습은 정권 비판의 빌미로 최상 등급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정치권에서의 비판과 여론의 압박에 밀려, 더 이상 해결을 미룰 수 없다는 조바심은 더욱더 극심해 지고 그렇다고 기존의 강경자세로는 집구석에 틀어 박혀 두문불출하는 북한을 설득하기는커녕 협상장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면서, 당초의 위세 등등하던 자신감과 조기해결에 대한 확신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 하루 속히 이 난국을 모면하고픈 소극적 방어기제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징후로선, 당초에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천명했던 북한측의 요구들에 대해 하나 하나씩 전향적인 수용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혹적인 조건을 제시해 오더라도 북한은 쉽사리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절정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절정의 시기란 바로, 요즘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권 교체 시기, 즉 기존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는 레임덕 시기를 겨냥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과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방북시기가 공히 양 정권의 말기 무렵에 갑작스레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금번 상황도 8년간의 임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이라크 침공 등 각종 외교군사적 실정과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기화로 촉발된 경제 대위기 상황 등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심각한 레임덕 상황에 처한 부시 대통령 정권 말 상황에 극적으로 타결되는 모습 등, 상당한 개연성을 띤다 하겠다.

이렇듯 내외 악재로 막다른 궁지에 몰린 미국 및 주변국들은 이제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탈출할 방법만 모색하게 된다. 즉, 비용이 얼마나 들어도, 별 실익이 없더라도, 더 이상 체면만 구기지 않을 수 있다면 북한의 요구는 최대한 수용하려는 마음가짐과 실질적 준비를 자발적으로 갖추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을 협상에선 “수용시간: Acceptance Time”이라 부른다. 이제 만찬의 시간이다. 그 기나긴 인고의 은둔을 제대로 보상 받을 때다. 결코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건들을 이제 북한이 아닌 미국 외교관들의 입에서, 경우에 따라선 비공개적으로 술술 흘러 나오기 시작하고, 그 내용들은 고스란히 정식 외교문서에 인쇄되고 서명되기 시작한다. 마치 이전부터 절친 했던 친구들의 옛 이야기처럼 아무런 저항이나 비판도 없이.

그리고 미국은 자신의 태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숭고한 외교노력 끝에 마침내 북한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처럼 그리고, 당초 결코 용납될 수 없다던 내용들이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외교 성과로, 최소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선택으로 탈바꿈 시켜 자화자찬하기 시작한다. 북한이 이제 할 일은 다만 그 것이 정말인 것처럼, 평양 발 언론보도에서 적절히 장단만 맞춰 주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미국과의 북핵 관련 외교협상전략을 타짜식으로 접근 분석해 보았다. 그런데 참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협상에서는 상대에게 잘 먹히는 협상 전략전술을 그 약발이 다 할 때까지 거듭 시행할 수 있으며,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전략전술 시행에 따른 폐단을 막을 수 있다’라고 배웠다. 만약 이 말이 맞는다면 북한의 타짜 협상전략은 곰탕 우려 먹듯 계속 우려 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면 우릴수록 그 맛이 더 강해지지나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