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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통일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 시기에도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존재했음에도 실제로는 몇백 년 전부터 강하게 자리 잡은 개념일 것이다. 바로 이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가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그렇기에 ‘다문화 정책’은 세계적인 흐름이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생소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온 나라에 갑작스레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시각적 신호가 먼저 들어오며, 동질감을 추구하는 본능까지 작동하면 이질성은 배척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인간 역사에서 ‘다름’은 배척과 타도, 심지어 학살의 원인이 되어 왔다.
한민족은 인류학적으로 몽골로이드 계열에 속한다. 그래서 다문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계와 동남아계 중 중국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동남아계 인구는 피부색과 이목구비 등 외모에서 차이가 커서 거리감을 느끼기 쉽다. 귀화한 중국인이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와, 귀화한 동남아인이 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할 때, 많은 기존 한국인들은 솔직히 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다문화 정책은 모두가 같은 한국인임을 강조하며 차별을 금지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자. 2023년 통계청에 따르면 외국인 인구는 약 24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2%이다. 다문화로 등록된 인구도 120만 명이 되지 않는다. 즉, 나머지 95%는 토종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정부나 정당은 다양성과 포용을 말하지만, 실제 정책의 핵심은 ‘통합’이다. 과연 대다수 한국인들이 모두 진심으로 환영할까?
동북아시아는 각기 다른 문명권을 형성해온 한·중·일 삼국으로 구성된다. 반면 유럽은 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여러 차례 받아왔다. 우리나라가 서양과 처음 충돌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였다. 그만큼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생활하며, 유학생으로서 다양한 차별을 겪었다.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해도 그들이 필자를 온전히 ‘미국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혹은 편견이 생겼다. 유대인 가운데 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이미 미국 사회의 주류다. 그들이 받아들여진 데에는 능력도 있었겠지만, 외모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이 결정적이었을 터다.
필자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동양인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다. 눈을 찢는 시늉을 하며 놀리는 학생들과, 그것을 ‘그저 장난’이라 넘기는 교사들. 필자는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쉽게 그 문을 닫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갔고, 음악 커리어를 그곳에서 완성했다. 독일 역시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그러나 필자가 두 차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들은 나를 ‘능력 있는 외국인’으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필자는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모두가 성공해야만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한국인들이 다문화인을 ‘외국인’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먼저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인식이 자리 잡아야 다문화 정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미국은 200년 전부터 다문화를 지향했지만, 노예제 폐지는 150년 전, 흑인 차별 철폐는 70년 전에야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인종차별은 여전히 만연하다. 소수에게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이며, 폭력이다.
다문화 정책은 변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수용보다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외국인은 외국인이다. 귀화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특정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과 다문화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서형민 피아니스트=베토벤 국제콩쿠르 우승자 출신으로 글로벌 활동을 하는 국내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서형민 피아니스트는 각국을 오가면서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해 다문화와 관련된 글로 ‘동거동락’(同居同樂)이라는 미래를 함께 꿈꾸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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