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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의 증오 지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일상에서의 발언 수위가 더 강해진다. 공격적 표현의 수준은 오래 알아온 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대개는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한 증오이지만 여기에 세대간, 성별간의 증오까지 가세한다. 가히 ‘증오사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미움을 넘어 증오에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증오의 대상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 감정에 대한 논리적·이념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증오 표현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관한 기록이다. 재판을 취재하면서 관찰한 것은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며 대단한 광기를 가지고 유대인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조차 생각하지 않게 만든 것이 그를 살인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념화한 증오가 평범한 개인의 도덕이나 윤리를 마비시키고 범죄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고 봤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증오가 그렇게 쉽게 퍼지는가. 아렌트는 증오가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제도화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갈등의 상황이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때 갈등은 이내 전쟁이 되고 만다. 이기는 것이 절체절명의 목표가 되고 나면 증오의 정치가 동원된다. 상대에 대한 증오만큼 우리 편을 강하게 결속하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영화 ‘콘클라베’의 한 장면이다. 교황 선출을 둘러싼 추기경들의 갈등과 긴장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명확하고 강경한 입장을 요구받는다. “이건 콘클라베입니다. 전쟁이 아니에요.” 로렌스 추기경은 말한다. 그러자 벨리니 추기경은 언성을 높이며 “전쟁입니다. 단장님도 한쪽 편에 서셔야 하고요”라고 한다. 교황을 선출하는 가장 신성한 절차조차 때로는 전쟁으로 여겨진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상대를 죽이든 내가 죽든 한 가지 결론밖에 없다. 증오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다.
다행인 것은 종종 증오의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증오가 인류 역사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아렌트가 비판했던 ‘무사고’의 인간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존엄성을 향해 행동하는 인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비록 극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들의 박수를 받으며 차기 교황이 선출된 것은 문제를 인정하고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난 추기경들이 있었고 여전히 콘클라베라는 절차를 통해 신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가 않을까. 증오하기 전에 나의 확신에 대해 다시 사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은 의심해 보는 것이다. 긴 민주주의의 역사와 우리 선조가 만든 제도의 틀을 존중하는 것이다. 설령 내가 지더라도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스스로 지켜 가는 것이다.
로렌스 추기경은 저마다의 확신이 화합과 관용을 해칠 수 있으며 의심과 성찰이 공동체의 건강한 결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