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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핵심 쟁점은 계약서에 있던 한 줄의 특약, 이른바 ‘책임한정특약’이었다. 계약서 특약사항에는 ‘매도인(신탁사 B)은 신탁재산 및 신탁계약의 업무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신탁사 B는 이 조항을 근거로, 설령 위약금 지급 의무가 있더라도 이는 오로지 해당 오피스텔 사업 자금, 즉 신탁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갚으면 될 뿐, 회사의 고유재산으로는 책임질 수 없다고 맞섰다.
1심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탁법에는 유한책임신탁이라는 제도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이를 위해서는 엄격한 등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신탁사 B는 이런 절차 없이 계약서 특약만으로 책임을 제한하려 했으니, 이는 법을 회피하여 수분양자에게 부당하게 위험을 떠넘기는 조항이므로 무효라고 판단했다. 신탁사의 고유재산으로도 위약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A씨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결과였다.
하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의 판단은 180도 달랐다. 법원은 ‘계약 자유의 원칙’을 강조했다. A씨가 계약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서명한 이상, 책임의 범위를 신탁재산으로 한정하기로 한 양 당사자의 합의는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신탁법에 유한책임신탁 제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당사자 간의 개별적인 책임한정특약까지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결국, 신탁사 B는 위약금을 지급하되 신탁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지급하면 된다는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 판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분양 계약서에 ‘신탁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있다면, 이는 단순한 설명 문구가 아니라 신탁사의 책임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방패막’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왜 무서운가? 신탁사가 아무리 건실한 대기업이라도, 개별 분양 사업의 자금 사정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만약 해당 사업이 어려워져 신탁재산이 모두 소진되거나 압류 등으로 묶여버리면, 수분양자는 신탁사를 상대로 승소 판결을 받고도 위약금은커녕 원금조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신탁사의 본사 금고는 굳게 닫혀있고, 텅 비어버린 사업 현장의 금고만 바라봐야 하는 셈이다.
따라서 신탁사가 시행 또는 분양하는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신탁사’라는 이름값만 믿어서는 안 된다. 다음 사항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첫째, 계약서, 특히 특약사항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책임한정특약’ 문구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그 의미를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둘째, 책임한정특약은 개발 사업의 위험 일부를 수분양자가 떠안는다는 의미임을 이해해야 한다. 사업이 순조로우면 문제가 없겠지만, 좌초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수분양자에게 돌아올 수 있다.
셋째, 신탁사의 명성이 아닌 해당 사업 자체의 안정성을 따져봐야 한다. 자금 조달 계획은 탄탄한지, 시공사는 믿을 만한지,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등을 다각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단 몇 분의 투자가 미래에 닥쳐올지 모를 큰 손실을 막아줄 수 있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라는 안일한 생각보다, 깐깐한 눈으로 나의 권리를 지키는 현명함이 필요한 때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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