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못생겼다" 황제 지적도 실력으로 잠재운 여인 [화폭역정 11]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오현주 기자I 2026.05.15 07:40:00

△18세기 파스텔 초상화 선구자 '로살바 카리에라'
파스텔, 서양화 주요 매체로
왕·귀족 실물보다 아름답게
유럽 전역서 부·명성 따랐지만
족쇄처럼 '외모평가' 따라붙어
시력 잃어가던 말년의 '자화상'
월계관 씌워 예술가 자부 기록

로살바 카리에라의 ‘자화상’(1746∼1747년경). 평생 남긴 여러 자화상 중 마지막 작품으로 ‘월계관을 쓴 자화상’이라 불려 왔다.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그렸다. 이후 생을 마치기 전까지 카리에라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았다. 일생 다른 이들의 초상에 썼던 밝고 화사한 색채를 벗겨내고 갈색·회색이 지배하는 화면으로 현재 닥친 시련에 대한 회한을 심어냈다. ‘파스텔화의 선구자’로 여성화가로선 드물게 부와 명성을 누렸던 지난 세월에 대한 자부도 엿보인다. 스스로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 의미를 부여했다. 종이에 파스텔, 35×27㎝. 아카데미아미술관(이탈리아 베네치아)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실력은 있지만 대단히 못생겼더군.”

18세기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던 화가 로살바 카리에라(1673∼1757)를 궁으로 불러들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6세는 그가 돌아간 뒤 이렇게 말했다. 이 무슨 무례한 말인가. 게다가 여인이 아닌가. 하지만 카리에라의 외모에 대한 일화는 이게 끝이 아니다. 절친한 벗이던 화가 안톤 마리아 자네티(1689∼1767)는 카리에라를 그린 캐리커처에서 활짝 웃는 사각 턱 아래 남성의 상징인 수염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강한 카리에라의 얼굴이 당시 유행한 달걀형의 창백한 얼굴, 앵두같은 입술을 가진 미인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의 기록에 카리에라의 외모가 왕왕 회자된 것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못생겨서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해야 이해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또 그래야만 카리에라의 끝없는 노력과 대단한 성공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앞선 시대의 모든 화가를 대상으로 내 초상화를 의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택할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렘브란트? 설마 피카소? 많은 이름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단연 1순위는 카리에라라고 할 것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날아가 곤돌라를 타고 작업실에 당도, 바로 초상화를 부탁한다면 불과 몇 시간 만에 방문객의 손에 작품을 들려줄 것이어서다. 표현이나 묘사로 흠잡을 일은 당연히 없고 거기에 더한 비결이라면 ‘빨리 마르는 그림’에 있다. 파스텔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카리에라는 서양화에서 파스텔을 주요 매체로 끌어올린 화가다.

유화 뺨치는 파스텔화…빨리 마르는 장점까지

카리에라의 화실은 베네치아 도르소두로 지구에 있었다. 대운하에 직접 면한 집이며, 오늘날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 자리 잡은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 바로 옆이다. 1700년경 가족이 이주해 온 이후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고, 이 집에서 일했고,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 못지않게 당시에도 베네치아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유럽 귀족 자제들이 거치는 그랜드 투어의 필수 코스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를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카리에라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을 둘러본 뒤 풍경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레토(1697∼1768)의 그림 한 점을 사고 마지막으로 카리에라의 화실에 들러 파스텔 초상화로 자신의 얼굴 한 점을 남기는 것이 18세기 청년 귀족이라면 베네치아에서 완수해야 할 의례였던 것이다. 그랜드 투어로 유럽을 돌아봤던 청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갈 정도였다. “베네치아에 다녀왔다고? 카리에라는 만났어? 못 만났어? 저런, 다시 가야겠구만.”

미국 시카고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1730)은 카리에라가 이끌어 낸 파스텔 초상화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초상의 모델을 영국 맨체스터 백작가의 한 영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관능과 유혹이라는 알레고리와 특정 인물의 초상이 결합한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를 들꽃으로 장식한 여인은 청록빛 새틴과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장난기 많은 앵무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앵무새의 부리가 여인의 가슴을 가린 얇은 천을 잡아당기고 있어 앞섶이 살짝 벌어져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허용이 된다. 파스텔의 부드럽고 흐릿한 효과를 통해 인물이 실제보다 더 돋보이게 그려진 것 같기도 하다.

로코코 시대 파스텔 초상화의 선구자. 이러니 카리에라의 화폭 앞에 서는 것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카리에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여인을 그렸고, 순례자의 복장을 한 남성들도 품위 있게 기록했다. 더욱이 파스텔은 유화처럼 건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니 베네치아를 잠시 스쳐 지나는 여행자들도 카리에라의 화실에서 하루만 보내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된 초상이 평생의 자랑이 됐다. 파스텔이라는 매체가 그랜드 투어의 유행과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카리에라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카리에라와 함께 베네치아 미술시장의 양대 축이던 카날레토보다 열 배가 넘는 유산을 남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로살바 카리에라의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1730년경). 예술적 기량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파스텔 가루를 손가락으로 펴 바르는 기법으로 의상의 레이스나 머리카락 질감까지 정교하게 묘사했다. 여기에 앵무새가 여인의 옷자락을 부리로 살짝 당기는 듯한 ‘장난기 가득한 에로티시즘’을 얹어 18세기 천재적인 파스텔 기법과 로코코 시대의 유혹적인 미학을 완벽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이에 파스텔, 60×50㎝. 시카고미술관(미국 시카고) 소장.
운명 스스로 개척…작품가 직접 매기고 장부 작성도

명성은 카리에라를 베네치아에 묶어두지 않았다.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인 모데나의 에스테 가문이 불렀고,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불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불러댔다. 또 가는 곳마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명성 뒤에는 부록처럼 외모에 대한 평가가 따랐다. ‘못생겼다’고 대놓고 타박했던 카를 6세만 특이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카리에라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쉬지 않고 일했다. 그림을 그린 것만이 아니다. 작품의 가격을 직접 책정하고 대금을 한 주 안에 수령했으며, 매달 가계의 장부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손으로 기재했다. 카리에라가 제작한 수많은 작품 이면에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이끌어 가려는 뜨거운 의지가 깔려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의지도 육체의 한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파스텔 초상화로 자신의 양식을 안착시키기 이전 카리에라는 상아 위에 세밀화를 그려넣는 일로 밥벌이를 했는데, 이때 눈을 혹사 시켜 만년에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조수처럼 자신의 일을 돕고 여행길도 함께했던 두 살 터울 여동생 조반나가 결핵으로 먼저 세상을 뜨고 곧이어 어머니마저 떠나자 카리에라는 심한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몇 달씩 대기하던 귀족들의 초상화 주문을 물리고 보이지 않는 눈을 되살려 보고자 수술도 감행했지만 별 효과 없이 실명의 단계를 밟아갔다.

그 시기 자신의 모습을 남긴 ‘자화상’(1746∼1747)이 있다. 일명 ‘월계관을 쓴 자화상’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웃음기 빼고 꽉 다문 입술에는 스스로 운명을 이끌어온 한평생의 자존이 새겨져 있다. 당대 여인이라면 즐겼을 화려한 색상의 드레스도 마다하고 단순한 갈색 작업복을 입은 채다. 하지만 월계관을 쓰고 있다. 고대로부터 월계관은 전쟁의 승리자에게 씌워졌지만 시와 예술의 신 아폴론이 관장하는 영역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은 자의 머리에도 올려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베네치아에선 성공한 예술가를 월계관으로 기리는 전통이 있었고 카리에라가 그런 월계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즉흥적인 선택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당대 베네치아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경력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서 그려넣은 것이란 뜻이다.

로살바 카리에라의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1730년경). 파스텔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을 극대화해 여인의 하얀 피부와 앵무새의 파란 몸체를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밝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채가 사라지고 갈색과 회색이 지배하는 화면 속에 실명을 앞둔 여성 화가가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월계관을 씌운 그림이라니. 영국 미술사가로 런던 국립미술관장을 지낸 마이클 리비(1927∼2008)는 18세기 베네치아 미술을 다룬 저서에서 이 자화상을 ‘비극의 뮤즈’라고 했다. 그러나 카리에라는 자신을 ‘뮤즈’로 해석할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캄캄한 어둠이 다가오기 전 마지막 시력이 남아 있을 때 서둘러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록했을 뿐이다.

카리에라는 평생 타인의 얼굴을 그렸다. 유럽의 왕족·귀족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록했고, 그 대가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타인을 그릴 때 카리에라는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렸지만 자신을 그릴 때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맞닥뜨렸다. 아름답게 꾸민 얼굴 위 월계관이었다면 그것은 장식에 불과했겠지만, 우울감에 빠진 노년의 얼굴 위 월계관은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의미다. 스스로 씌워준 월계관의 자화상은 가장 단호한 형태의 자기 긍정이 아니었을까. 이후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10년을 카리에라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았고, 그렇게 붓을 내려놓기 전 그 일을 완수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남겨놓는 일 말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