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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과일 바구니 하나가 돌 선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밖으로 밀려 나온 바구니는 조금만 건드려도 보는 사람 쪽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배경은 텅 비어 있다. 이 과일 바구니와 연결될 법한 신화도, 우화도, 그럴듯한 실내도 없다. 오직 밝은 벽 앞에 과일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재현에 우리는 사로잡히고야 만다. 사과에는 벌레가 파먹은 구멍이 뚫려 있고, 잘 익은 무화과는 살이 벌어졌으며, 포도 몇 알은 이미 물러 터지기 시작했다. 잎사귀는 싱싱한 초록이 아니라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라 오그라들고, 어떤 잎은 반점이 번져 병든 기색이 완연하다. 이탈리아의 스물일곱 젊은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는 이 시들어가는 것들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았다.
훗날 이 그림 ‘과일 바구니’(1599)는 식물학자와 원예학자, 나아가 식물병리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됐다. 화면 속 잎과 열매에서 병증을 종별로 밝혀냈을 정도다. 어느 잎의 구멍은 동양과실나방 유충이 갉은 자국이고, 다른 잎의 반점은 탄저병이며, 또 어느 잎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사과와 배에는 저마다 다른 벌레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림 한 점이 이렇게 정밀한 과학적 판독에 참조되는 일은 흔치 않다.
이 정물화의 급진성은 솜씨의 정밀함에만 있지 않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정물화는 화가가 마지못해 그리는 하급의 장르였다. 역사화와 종교화가 그림의 정점에 있었고, 꽃이나 과일을 그린 정물화는 그 아래에 놓였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그 위계를 뒤엎었다.
천상은 없다…로마 뒷골목에 출현한 성인들
카라바조는 1571년 밀라노 부근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부르는 그의 이름은 성이 아니라 고향마을이다. 생전에 그는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라고 불렸고, 후대에는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와 구별하기 위해 ‘카라바조’라고 기록됐다. 여섯 살이 되던 1577년 밀라노를 휩쓴 역병이 하루아침에 카라바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함께 데려갔고, 열세 살 무렵에는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예고 없이 가장 가까운 이들을 한꺼번에 잃는 죽음을 겪었다.
밀라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다가 스물한 살 무렵 카라바조는 로마로 향했다. 로마는 당대 미술의 심장이었고 야심을 가진 젊은 미술가들의 각축장이었다. 무명의 카라바조는 당연하게도 궁핍하게 로마생활을 시작했다. 생계형 일자리로 큰 그림에 들어갈 부분적인 꽃과 과일을 도맡아 그리기도 했는데, ‘과일 바구니’의 놀라운 기량은 이 밑바닥 삯일의 시간 속에서 벼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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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연이 한 인간의 생애와 미술사를 바꾸는 순간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델 몬테 추기경의 주선으로 무명의 카라바조가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부속 콘타렐리 예배당에 걸리게 될 ‘성 마태의 부름’(1599∼1600)을 그리게 된 것이다. 카라바조의 명운이 걸린 작품이었다.
‘성 마태의 부름’은 어두운 방 안이 무대다. 그 속에 다섯 사내가 탁자에 둘러앉아 있다. 그들은 돈을 세고 장부를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때 오른쪽 짙은 어둠 속에서 두 인물, 예수와 베드로가 걸어 들어온다. 예수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무리 가운데 한 사람(수염을 기른 세리 ‘마태’)을 가리킨다. 성스러운 부름의 순간이지만 카라바조가 포착한 것은 부름과 응답 사이의 아득한 틈이다. 세속의 욕망과 성스러운 소명이 한 화면에서 팽팽히 맞선다.
이 그림을 한 시대의 정점으로 끌고 간 부분은 무엇보다 화면 속의 빛이다.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온 한 줄기 빛은,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의 전신은 어둠에 묻어 두고 그의 손끝을 따라 대각선으로 흘러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동전에 눈을 박고 있는 다른 사내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짙은 어둠을 화면의 주역으로 삼는 이 명암법은 카라바조의 이름과 함께 한동안 유럽회화의 문법이 됐다.
파격은 빛과 구성에만 있지 않았다. 그림 속 인물들은 로마 뒷골목에서 데려온 당대의 얼굴들이다. 신약성경 시대의 복장이 아니라 카라바조 당대에 유행하는 옷을 입고, 깃을 세운 상의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다. 예수와 베드로만이 시대를 초월한 헐렁한 옷차림이어서 두 세계가 한 화면에서 부딪친다. 카라바조는 성스러움을 저 높은 이상의 하늘에서 끌어내려 술집에서나 볼 법한 낯빛의 사람들로 채워 구체적인 현실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다.
‘성 마태의 부름’과 함께 주문받은 ‘성 마태의 순교’(1599∼1600), ‘성 마태와 천사’(1602)가 차례로 공개된 뒤 카라바조는 확고한 성공가도에 진입했다. 단숨에 로마에서 화제의 중심인물로 떠올랐고, 그림 요청이 밀려들었다. 특히 젊은 화가들이 강렬한 명암과 사실적 인물 묘사에 열광해 그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곧 ‘카라바조파’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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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저자의 목을 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
1606년 5월 28일 카라바조는 로마의 좁은 골목에서 한 사내와 맞붙었다. 오랜 원한이었다고도 하고 내기였다고도 하나 그 이유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짧고 어지러운 난투 끝에 상대편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카라바조도 머리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고는 하지만 잠시 뒤 사내는 숨을 거두고 카라바조는 그 순간 살인자가 됐다. 그날 밤에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도망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은 그에게 ‘반도 카피탈레’를 선고한다. 누구든 그를 알아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로마 전역에 걸린 사형선고였다.
이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4년은 처절하다. 카라바조는 나폴리로 달아났다가 지중해를 건너 몰타섬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사고를 일으켜 투옥되고 축출됐다. 다시 시칠리아를 떠돌다가 나폴리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정체 모를 무리에게 습격을 당해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면을 얻어 로마로 돌아가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던 카라바조는 유력자들의 손을 빌려 그 길을 뚫으려 했다. 마침내 사면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드디어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로마의 흙을 밟지 못했다. 토스카나 해안의 작은 항구에서 열병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610년 서른여덟 살이었다. 사인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열병이라지만 그 정체를 두고 패혈증·말라리아, 혹은 납 중독이란 추측들이 있고, 그가 살해한 자의 가문이 보복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카라바조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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