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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존심을 회복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여러 기업에서 대전 팀이 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화약과 동아 건설, 태평양, 럭키금성, 농심, 쌍방울 등 굴지의 기업들이 모두 손을 들고 나섰다.
KBO는 한껏 진입장벽을 높였고, 결국 그 모든 조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기업은 한국화약 뿐이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한국화약이 팀을 인수했는데 왜 빙그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건 당시 한국화약 그룹의 유일한 소비재 생산 기업이 빙그레였기 때문이다.
각 팀에서 선수를 구걸하다시피 모았던 빙그레. 1986년 한희민과 김상국이라는 최고 투수와 포수 유망주를 뽑으며 팀의 근간이 마련됐다.
그러나 그해 빙그레의 성적은 종합 꼴찌. 빈약한 선수층은 결국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군 한희민 등 가능성을 확인한 투수들이 있었고, 타격도 조금씩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대구 출신 이정훈을 드래프트로 뽑는 행운이 더해진 빙그레는 이상군 한희민 원.투 펀치를 더해 1987시즌 탈꼴찌에 성공했다.
그리고 응답이 필요했던 1988년. 빙그레는 승리 청부사 김영덕 감독을 영입해 팀을 재편한다. 김 감독은 강력한 훈련을 통해 팀의 전력을 빠르게 끌어올린다. 당시 김 감독의 훈련을 통해 성장한 선수 중엔 한용덕 장정순 등이 있었다. 이들은 빙그레의 선수층을 넓히는데 크게 힘을 보탰다.
빙그레는 1988년 전기리그를 34승20패로 마치며 2위를 차지했고 후기리그서도 28승1무25패로 3위에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이어 플레이오프서 삼성을 3연승으로 무너트리며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하지만 당대 최강은 해태(현 KIA) 타이거즈였다. 빙그레가 넘기엔 너무 큰 산이었다. 당시 팀 타율에서 해태와 빙그레는 각각 2할8푼3리와 2할6푼6리, 팀 방어율에선 2.86과 3.72로 큰 차이가 났다. 결국 2승4패로 분루를 삼켜야 했다.
1989년은 우승의 적기로 여겨졌다. 빙그레는 71승3무46패로 종합 승률 6할4리를 기록, 전체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하지만 상대팀 해태는 이미 단기전의 최강자로 업그레이드 된 팀이었다.
빙그레는 한희민 이상군 한용덕 송진우 강정길 이강돈 이정훈 장종훈 등 수준급 선수들로 팀이 꾸려졌지만 큰 경기 경험에선 해태를 따라가지 못했다.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채 4전 전패로 준우승. 너무나도 뼈아픈 순간이었다. 결국 빙그레는 1993년 말 모기업인 한화로 이름이 바뀌었고 우승은 1999년에 가서야 처음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빙그레는 짧은 시간 동안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팀이었다. 응답하라 1994에서 이미 팀 명이 바뀌었음에도 대전 출신 바로의 극중 별명이 빙그레였다는 점에서 그 임팩트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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