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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10연패 신화 뒤에 숨은 땀과 눈물[파리올림픽]

이석무 기자I 2024.07.29 20:25:30
올림픽 10연패를 달성한 한국 여자 양궁대표팀 남수현, 임시현, 전훈영이 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 양궁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뒤 기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여자 양궁이 당연히 세계 최강 아냐?’라고.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치열한 내부 경쟁과 엄청난 훈련량, 그리고 막중한 부담을 이겨낸 투지의 결실이다.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이 올림픽 단체전 10연패라는 대위업을 이뤘다. 임시현(21·한국체대), 남수현(19·순천시청), 전훈영(30·인천시청)으로 이뤄진 대표팀은 지난 29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레쟁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중국과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트포인트 5-4(56-53 55-54 51-54 53-55 <29-27>)이기고 값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6년간 이어져온 여자 단체 ‘신궁의 역사’

한국 여자 양궁은 단체전이 처음 도입된 1988년 서울 대회부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이 종목 10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올림픽에서 특정 국가가 특정 종목에서 10회 연속 우승을 이룬 것은 한국 여자 양궁 단체전과 미국 남자 수영 400m 혼계영, 단 두 종목 뿐이다

신화는 ‘신궁’ 김수녕(53)이라는 걸출한 스타로부터 시작한다. 단체전이 처음 도입된 1988 서울올림픽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김수녕은 왕희경(54), 윤영숙(52)과 함께 압도적인 실력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1992 바르셀로나 대회에선 이은경(52), 조윤정(54)과 더불어 두 번째 단체전 금메달을 이끌었다.

1993년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던 김수녕은 6년의 공백을 깨고 1999년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 당시 정몽구 대한양궁협회 명예회장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세 번째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성현(41), 기보배(36)도 여자 양궁 단체전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성현은 2004 아테네올림픽과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의 금메달을 견인했다. 특히 아테네 대회 때 중국과 결승전에서 마지막 발 기적 같은 10점을 쏴 1점 차 우승을 이끈 순간은 지금도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기보배는 2012년 런던 대회와 2016년 리우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 수확의 중심이었다. 리우 대회는 처음으로 세트제가 도입돼 더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기보배의 관록이 결정적 순간 빛을 발했다.

△초짜들의 대표팀...“뽑혀버린 걸 어떡해요. 그냥 했죠”

한국 여자 양궁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늦게 열린 도쿄 대회에서 안산(23), 강채영(28), 장민희(25)가 9번째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하며 건재함을 증명했다. 파리에서도 그 신화는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파리올림픽 금메달이 더 놀라운 것은 위업을 이룬 대표팀 멤버 3명이 모두 ‘올림픽 초짜’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더 따가운 우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3관왕인 임시현은 그래도 국제대회 경험이 있었다. ‘맏언니’ 전훈영과 ‘막내’ 남수현은 달랐다.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올림픽의 중압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물음표가 붙었다.

근거가 전혀 없는 우려가 아니었다. 대표팀은 올해 월드컵 1, 2차 대회 단체전에서 잇따라 중국에게 져 준우승에 그쳤다. 공교롭게도 이번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도 중국이었다.

중국은 이 종목에서 은메달을 5개나 땄다. 늘 금메달 문턱에서 한국에 막혔다. 한국을 넘기 위해 이름난 한국인 지도자도 수없이 데려왔다. 이미 최근 월드컵에서 두 차례나 이겨본 만큼 이번에는 자신감이 더 컸다.

하지만 한국은 역시 승부처에서 강했다. 국제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공정하고 치열한 내부 경쟁을 이겨낸 선수들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전훈영은 한 차례 아픔이 있었다. 2020년 국가대표 선발전에 통과해 도쿄올림픽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대회가 1년 연기되자 대한양궁협회는 ‘그해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를 뽑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2021년 대표 선발전을 다시 개최했다.

그때 태극마크를 되찾지 못했던 전훈영은 3년의 기다림 끝에 파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저 같아도 우려가 됐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난 진짜 못 보던 선수이기 때문이다”며 “‘공정한 과정을 거쳐 내가 선발됐는데 어쩌나. 그냥 내가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버틴 것 같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대표팀 에이스라는 중책을 맡았던 임시현의 부담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항상 왕좌를 지킨다고 하지만 멤버가 바뀐 지금 우리에게는 10연패가 새로운 도전이자 목표였다”며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게 이 한 발로 무너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2005년생 막내’ 남수현은 올해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10대다. 초짜 중에서도 가장 초짜였다. 하지만 결승전 슛오프에서 임시현과 함께 10점 만점을 쏘는 담대함을 보여줬다. 그는 “10연패를 목표로 연습하면서 부담감이 컸다”면서 “(우리끼리) 10연패를 도전이라고 생각하자고 한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부담감 덜어낸 태극 女궁사, 이제 개인전서 선의의 경쟁

단체전 10연패라는 큰 숙제를 해결한 여자 대표팀 선수들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개인전에 도전한다. 함께 힘을 합쳤던 세 선수도 이제 메달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한다.

임시현은 랭킹 라운드에서 세계신기록(692점)으로 1위에 올랐고 남수현이 2위(688점), 전훈영이 13위(664점)에 자리했다. 우리 선수끼리 금·은·동메달을 싹쓸이하는 행복한 상상도 충분히 해볼만 하다.

전훈영은 “단체전 10연패를 가장 큰 목표로 생각하고 왔는데 이제 그 목표를 이뤘다”며 “개인전에는 조금 더 마음 편하게 경기에 임할 것 같다”고 말했다.

3관왕을 목표로 하는 임시현도 “이제 첫 발을 내디뎠다”면서 “앞으로 개인전이나 혼성 단체전도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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