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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혁은 대표팀 동생 김우진(29·청주시청), 김제덕(17·경북일고)과 함께 출전한 도쿄올림픽 남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대만을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남자 대표팀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 이어 단체전 2연패를 달성했다.
2012년 런던 대회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차지했던 오진혁은 이번 금메달로 9년 만에 다시 올림픽 시상대 맨 위 자리에 우뚝 섰다.
양궁 선수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오진혁이지만사실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수차례 반복됐던 슬럼프와 부상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1999년 충남체고 3학년 때 성인 대표팀에 발탁됐던 오진혁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선발전에서도 탈락의 쓴맛을 보자 태극마크를 놓쳤다는 아쉬움에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다행히 당시 현대제철 감독이었던 장영술 현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의 도움으로 실업팀에 둥지를 틀었고 다시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오진혁은 2009년 대표팀에 복귀한 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견인했다. 이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선수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오진혁에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어깨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이듬해 오른쪽 어깨 근육이 끊어졌다. 고질적인 통증이 악화됐고 큰 부상으로 이어졌다. 어깨 회전근 힘줄 4개 가운데 3개가 끊어졌다.
의사는 은퇴를 권유했다. 수술을 해도 어깨가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진혁은 올림픽에 한 번 더 서겠다는 일념으로 수술을 받지 않고 버텼다. 경기를 치를 때마다 진통제 등 각종 주사를 맞으면서도 올림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깨가 약해진 만큼 활도 가볍고 약한 것으로 바꿨다. 바람에 더 취약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험과 감각으로 약점을 극복했다.
위기도 있었다.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고통의 시간은 그만큼 길어졌다. 그래도 오진혁은 버텼다. 20대 김우진, 10대 김제덕 등 한참 어린 후배들을 이끌면서 도쿄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결국 오진혁은 든든한 두 동생들과 함께 나선 도쿄 올림픽 단체전에서 나섰고 마음 속 한으로 남았던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진혁은 이번 대회를 통해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틀어 양궁 역대 최고령 금메달리스트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얻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