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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커플’의 주인공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남편을 둔 탓에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엄앵란이 고 신성일을 떠나보내며 한 말이다.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신성일의 영화인장 영결식이 거행됐다. 영결식은 독고영재의 진행으로 묵념과 약력보고, 추모영상 상영, 조사 및 추도사, 분향 및 헌화, 유가족 대표인사, 폐식선언으로 엄수됐다.
엄앵란이 유가족을 대표해 감사인사를 했다. 엄앵란과 고 신성일은 1964년 결혼했다. 엄앵란은 고인의 영정 사진을 보며 “가만히 앉아서 사진을 보니까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고 운을 뗐다. 엄앵란은 “주변에서 왜 울지 않느냐고 하는데 신성일을 울면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울면 망자가 마음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걷는단다. 억지로 참고 있다. 집에 가서 불 끄고 실컷 울 것”이라고 말했다.
시종일관 엄숙하게 진행됐던 영결식은 엄앵란이 인사말 중 불쑥 꺼낸 말에 분위기가 한 결 누그러지기도 했다. 엄앵란은 “(우리) 엉망진창으로 살았다”고 얘기했다. 엄앵란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에서 가늠할 수 없는 곡절이 읽혔다. 엄앵란은 “신성일이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산다면 그때 선녀같이 공경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늦었다”면서 영격식에 참석한 추모객을 향해 “여러분, 부인들께 잘하세요”라는 말로 인사말을 마쳤다.
1937년생인 고 신성일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맨발의 청춘’(1964)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길소뜸’(1985) 등 500여편의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60~70년대 청춘스타로, 국민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2000년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지만 최근까지 이장호 감독과 영화 ‘소확행(가제)’을 준비하는 등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영화계는 고 신성일에 대한 훈장 추서를 추진 중이다. 영화계가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문화체육관광부에 훈장 추서를 제안했다. 다만 고인이 과거 뇌물 수수 혐의로 형을 받은 일로 정부의 검토 및 판단이 필요해 추서까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또 내년(2019)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 영진위원회(이하 영진위)와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고 신성일을 조명하는 이벤트를 논의할 계획이다.
고인의 시신은 화장 후 이날 오후 3시 경북 영천 선영에 영면한다. 이튿날인 7일 오전 11시에는 경북 영천에서 추모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