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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은 스스로를 "늦깎이이자 거북이"라고 칭했다. 20대 초반 연극으로 시작한 연기인생이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야 꽃 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조필성과 자신은 닮은 부분이 많다고 했다.
영화 '거북이 달린다'에는 김윤석 말고 또 다른 거북이가 있다. 바로 송기태의 여자친구 경주로 분한 선우선이다. 1975년생인 선우선은 우리나라 나이로는 서른 다섯살이다. 여배우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우선은 거북이 같은 끈기와 타고난 동안으로 올해 가장 주목받는 연기자가 됐다.
선우선은 '거북이 달린다'가 개봉하기 전인 지난 5월 하순 종영한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재벌가 막내딸 은소현으로 분해 안방극장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은소현은 남들 앞에서는 도도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여려지고 애교도 서슴지 않았던 캐릭터. 선우선은 특유의 시원한 미소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은소현의 캐릭터를 완성했고 시청자들은 안방극장의 새 얼굴에 환호를 보냈다.
“사실 저는 오디션의 여왕이었어요. 지금까지 본 오디션만 합쳐도 수백 번은 훨씬 넘을 거예요. 지난해 ‘거북이 달린다’ 촬영할 때까지만 해도 동네 목욕탕에 가도 알아보시는 분들이 없었는데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은 연기자가 됐지만 선우선은 십대시절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어려워했다. 중학교 시절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고자 태권도학원에 갔다. 이후 태권도가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됐고 이를 살려 대학의 사회체육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진로에 대해 생각하던 중 선우선은 자신의 내면에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선우선은 고민 끝에 연기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선우선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대형 소속사에서 밀어주는 신인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 본 오디션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 선우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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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조폭마누라2'로 연기에 데뷔했지만 이후에도 매번 오디션에서 낙방했을 뿐 뚜렷한 배역을 따지 못했어요. 집에 손 벌리기 싫어 태권도 사범도 하고 에어로빅 강사도 했었죠. 그러다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오프로드’를 촬영하게 되면서 다시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선우선은 ‘오프로드’에서 여자주인공이었지만 창녀 역할이었다. 이후 촬영한 ‘마이 뉴 파트너’에서도 주인공을 궁지에 빠트리는 트랜스젠더 역을 맡았다. 한마디로 범상치 않은 역할들만 주로 맡았던 것.
“엄마가 ‘오프로드’가 끝나고 나니 절에 새벽 기도를 다니시기 시작했어요. 아빠는 딸이 영화 주인공 되었다고 좋아하셨는데 나중에 한숨만 푹푹 쉬셨죠. 애가 창녀가 되어 화면에 나왔다면서요. 그때부터 제가 ‘좀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작품을 만나야겠구나’ 란 오기 비슷한 게 생기더라구요.”
이때 자신을 가다듬은 것이 일종의 ‘거북이’ 정신이었다. 거북이는 한 번에 몇 계단을 뛰어오르지는 못해도 차근차근 꾸준히 자신의 계단을 오르는 지구력과 끈기가 있다.
또 수차례 오디션을 보면서 ‘거북이 달린다’의 경주 캐릭터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하반기 기대작인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에서 액션연기를 선보이는 요괴 역을 맡게 됐고 올해 초 ‘내조의 여왕’에서 은소현 역으로 대중들의 확실한 눈도장을 받게 됐다.
“‘내조의 여왕’에서 은소현 역을 해보니 ‘거북이 달린다’의 경주가 오히려 행복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주를 연기할 때는 잘 몰랐는데 어쨌든 경주는 기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소현은 사랑을 받지 못한 캐릭터였죠. 소현이 더 외로웠을 것 같아요.”
선우선은 ‘거북이 달린다’의 경주와 ‘내조의 여왕’ 은소현을 비교하며 경주가 더 부러운 캐릭터라고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선우선에게 사랑과 결혼에 대해 물었다.
“나이가 얼만데 가슴 아픈 사랑 한 번 해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결혼에 대해서도 부모님께서 말씀도 꺼내지 않으세요. 결혼한 언니 때문에 조카가 있는데 요즘 조카가 이모 자랑한다고 신이 났어요. 그런 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만족하고 행복하죠.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아주 크거나 절실하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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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정유진인 그에게 선유선이란 예명이 독특하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절에서 3000배를 하고 나서 생각난 이름이 선우선이었다고 한다. 막상 작명소에서는 좋은 이름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름을 바꾼 이후부터 좋은 일이 더 많았다. 엄마 자랑만 하면 언니가 서운하다며 ‘내조의 여왕’ 때 언니가 모든 스태프들에게 샌드위치를 돌린 이야기도 꼭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지막으로 ‘거북이 달린다’나 ‘내조의 여왕’에서는 액션 연기를 해 보일 수 없어서 섭섭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태권도 공인 4단은 연예계에서 남자들도 없는 자격증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인 ‘전우치’에서 액션 연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보여드릴게 많아요. 거북이처럼 지지치 않고 꾸준하게 앞으로 가는 제 모습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