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광기에 휩싸인 열연으로 극찬을 받고 있는 이병헌의 말이다.
이병헌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의 개봉을 앞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올 여름 출격하는 한국영화 ‘빅4’의 마지막 주자로,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인기 웹툰 ‘유쾌한 왕따’가 원작으로 이 작품의 2부 ‘유쾌한 이웃’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거쳐 각색됐다.
지난 1일 언론 배급 시사를 통해 베일을 벗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공개 이후 관객들은 물론, 평단으로부터 ‘올해의 영화’란 극찬까지 받으며 유독 호평일색이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렬한 블랙코미디로, 때로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속도감있게 변주해 몰입감과 여운을 남긴다는 평가다. 특히 작품에 쏟아지는 극찬의 중심엔 극의 주축을 이끈 이병헌의 열연이 있다. 이병헌은 황궁 아파트 주민대표가 된 ‘김영탁’이란 인물을 연기했다. 이병헌은 권력, 대표성과 거리가 먼 하층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던 한 사람이 어느날 권력을 갖게 되며 겪는 급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여줬다. 또 그 자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사로잡히는 집착과 광기를 소름끼치게 표현해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함께 호흡한 박보영은 선배 이병헌의 연기를 두고 ‘안구를 갈아끼운 연기’란 표현으로 존경을 드러내기도.
이병헌은 박보영의 반응을 향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요즘 배우들은 눈알을 몇 개씩 가지고 다닌다”란 너스레로 취재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캐릭터 연기 과정에 대해 “리더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쩌다 리더가 됐는데 사실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제정신이 아닌 상황인 것”이라며 “여러 시련들로 자신의 삶을 놔버린 지경에 놓인 사람이 어느날 주민 대표가 되며 갑작스러운 신분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기본의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신분이 리셋이 된 것이다. 원점에서 자신의 신분을 다시 시작하게 된 상황에 그 사람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 중에선 상황과 신분이 변함에 따라 남들보다 큰 폭의 변화를 보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영탁이란 사람은 한 번도 누군가를 대표하는 위치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소시민이었기에 그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거친 독재자가 되어버린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시사회를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완성본을 접한 만족감도 드러냈다. 이병헌은 “이 영화의 촬영이 끝난 지는 꽤 오래됐고, 그 사이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지 않나. 그 시간동안 감독님이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계셨구나 깨달았다”며 “매번 볼 때마다 영화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거 어제 완성본을 보니 정말 잘 만든 작품이구나, 완성도가 높구나 감탄하면서 봤다”고 전했다.
소시민이 광인이 되기까지, 감정선의 낙차가 큰 인물을 연기하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을까. 이병헌은 “기본적으로는 시나리오에 나와있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 애를 쓴다”며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해하려 애쓰다 보면 그 인물이 지닌 복잡미묘한 감정의 상태를 내 나름대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영탁은 이미 자신을 죽었던 사람처럼 여긴 인물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가 리더란 새로운 위치에 서서 뭔가를 하는 과정에서 고민 후 옮긴 행동도 있었겠지만, 순간의 감정에 휩싸인 즉흥적 판단들도 분명 많지 않았을까”라며 “점점 더 커지는 권력을 스스로가 주체를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과정에서 점점 더 광기에 휩싸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영화계를 지키며 ‘연기의 신’이란 찬사를 입이 아프도록 듣고 있는 그조차 연기자로서 본인이 표현하는 감정에 불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병헌은 “내가 연기를 한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상상에 의존해 ‘이 인물은 이런 감정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며 늘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연기를 한다. 하지만 ‘내가 판단한 감정이 맞지 않는다면 어떡하지?’란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철저히 분석하고 의도해 표현해낸 감정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지 못할까봐 확신할 수 없는 순간들도 많다고 털어놨다.
이어 “특히 이번 작품처럼 이렇게나 센 감정들이 군데군데 등장하는 영화일수록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기 전까지 불안한 감정이 크다. 다행히 관객분들이 시사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주시니 그때의 불안했던 감정들이 조금씩 자신감으로 바뀌어가더라. 연기라는 행위가 그런 감정들의 되풀이란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배우란 대중예술인으로서 자신이 캐릭터로 표현하는 감정선이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도 전했다. 이병헌은 “내가 혼자서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라 똑같은 글을 읽어도 그 안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고 연기했다면 그 정서를 관객분들이 공감하며 함께 가져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내가 캐릭터를 연구하며 그의 감정을 추측해내는 과정과 형태가 보편성을 갖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무리 확신을 갖고 연기해도 이 일이 뚜껑을 열고 보여지기 전까진 어떤 식으로든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보듯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대중의 보편적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소신도 덧붙였다.
한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8월 9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