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의 개봉을 하루 앞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린 전쟁 액션 대작이다. ‘노량’은 개봉 하루 전 사전 예매량 23만 명을 넘어서며 예매율 1위에 등극, 앞서 흥행한 ‘서울의 봄’을 이을 연말 최대 기대작으로 꼽힌다. 김한민 감독이 ‘명량’을 시작으로 ‘한산: 용의 출현’을 거쳐 10년 만에 완성한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정재영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군을 정벌하는 조명연함함대의 총사령관, 명나라 수군 진린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진린은 조선과 왜군의 7년 전쟁을 도운 동료로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과 존중, 전우애를 지닌 인물이다. 장군으로서는 적과 상대의 의중을 날카롭게 간파하며, 명분을 지키는 것 못지 않게 실리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인 리더다. 엄밀하게 자신이 상사임에도, 이순신 장군을 ‘노야’(어르신을 높여 칭하는 말)라고 부르는 등 돈독한 세월의 우정을 쌓았다. 그런 진린도 영화 초반에는 왜군의 기세가 완전히 기울어져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전쟁을 어떻게든 끝까지 밀어붙여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이순신 장군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량’에서는 싸움의 주체가 아닌 조력자, 제3자의 입장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실리와 이순신 장군과의 의리 사이에서 나름의 고민을 기울이는 진린의 고뇌가 드러난다.
정재영은 “시나리오 받기 전 감독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라는 정보만 들었다. 그러고 시나리오를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먹먹했다. 감동적이었다”며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도 뒤에 찾아오는 감동과 먹먹함이 매우 좋았다. 이것은 무조건 같이 참여해야겠다 읽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고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1996년 데뷔해 27년을 연기한 베테랑 정재영은 ‘노량’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어 연기에 도전했다. 영어도 일본어도 아닌 고대 중국어를 배워 진린의 감정선을 표현하고 전달해야 했다.
정재영은 “참여하는 것까진 좋은데 명나라 말로 연기해야 하지 않나. 이 부분이 큰 걸림돌이었다”며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준비해서 표현해야 하지. 연기를 오래 했지만 남의 나라 말로 연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걸 사투리 정도로 생각해서 연기해야 하는 건가 감이 안 왔다. 연기에서 언어가 반 이상 차지하는데 이걸 표현 가능할까 막막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처음엔 그래도 얕잡아 본 듯하다. 그러다 대 여섯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중국어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는데 하면 할수록 너무나 어려운 거다”라며 “대충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고 흉내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가 또 외국어를 배워 잘 구사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이럴 때 대비해서 영어라도 좀 해놓을 걸 후회했다. 그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고생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명나라 장군 ‘등자룡’ 역할을 맡은 허준호와 중국어 연기에 서로 도움을 받았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선 “서로 자기 대사 연습하기 바빴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현장에서도 한국말을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해서 거의 말을 안 했다”며 “현장에서 한국말 쓰다가 중국어 특유의 성조 억양, 뉘앙스 등을 까먹을까봐 무서웠다. 또 중국말이 겉으로 듣기엔 리드미컬해보여서 흉내내면 될 것 같은데, 중국어 선생님이 들리는 대로 리드미컬하게만 발음하다간 큰일난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함부로 발음하며 연기했다가 명나라를 무시하는 게 될 수 있다고 주의를 주셨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직접 결과물로 자신의 연기를 보니 어떻냐 묻자 정재영은 “저는 모른다. 다만 명나라 언어가 지금의 북경어가 거의 바탕이라고 하더라”며 “그래서인지 중국에 살다 오신 분, 유학하신 분들 말로는 ‘그래도 노력을 많이 한 게 보인다’고 말씀주셨다. 일단은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 계기로 다음에 외국어 연기를 하게 된다면 자신감이 좀 붙지 않겠냐는 질문에 “자신감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투덜거려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차라리 그런 건 있다. 아무도 모르는 외계어를 연기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 자신있을 거 같다”고 덧붙여 폭소를 유발했다.
진린의 캐릭터성, 감정선을 연구한 과정도 설명했다. 정재영은 “최대한 진린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연기했다. 진린의 입장에서 저는 제3자이고, 일본과 조선이 싸우는데 도와주러 온 동네 잘 나가는 형 포지션이지 않나. 조선은 왜군이 끝까지 다신 얼씬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로선 더 피해를 크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장수니까 본국의 입장도 신경써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근데 심적으로는 이 친구(이순신)를 너무너무 또 좋아하니 내적 갈등이 있는 거다. 감독님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캐릭터를 이분법적으로 그리지 않으셨다. 각 나라 캐릭터들이 입체적이고, 각자 입장에 다 설득력이 있었다. 저 역시 연기할 때 최대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했다”고 부연했다.
한편 ‘노량’은 오는 12월 20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