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 창립과 함께 박승빈 제 1대 회장이 탄생한 이래 50대 정몽준 회장까지 대한축구협회는 모두 25명이 회장을 맡았지만 대부분 추대 형식이었다. 국기와 다름없는 축구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여운형(2대) 신익희(7대) 윤보선(9대) 장택상(12대) 등 정치인과 하경덕(5,6대) 장기영(19, 21,23대) 등 언론인, 최순영(39,40,41,42,43대) 김우중(45,46대) 정몽준(47,48,49, 50대) 등 기업인 등 화려한 이력을 갖춘 인사들이 수장을 맡아온 것이다.
사상 첫 경선은 이같은 흐름에 반기를 든 축구인 출신 이시동 당시 동방운수 사장이 1978년 1월 21일 제 36대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이뤄졌다.
‘한국축구 100년 비사’라는 책에 따르면 표대결까지 이르진 못했으나 제 35대 회장 자리를 두고도 김윤하 회장(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에 맞섰던 이시동 사장은 36대 회장 선출을 앞두고 한홍기(포철 감독) 강준영(한일은행 감독) 함흥철(조흥은행 감독) 김지성(연세대 감독) 등 원로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회장직에 도전했다. '이시동 지지파'는 김윤하 회장이 축구인들을 푸대접했다고 주장하며 축구인 출신이 회장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당시 이시동 사장은 연간 8000만원의 사재 출연과 함께 축구 저변 확대, 공개 행정, 축구 외교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김 회장은 축구회관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강조하며 ‘전용구장 건설’을 약속했다.
사상 처음 표대결이 이뤄진 제 36대 회장 선거는 결국 11-6으로 김 회장의 승리로 끝났으나 승패에 관계없이 축구인 출신이 회장이 되겠다고 나선 점과 표대결로 회장을 뽑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두 번째는 1997년 제 48대 회장직을 두고 이뤄졌다. 당시에는 김우중 회장에 이어 1993년 제 47대 회장에 올라 재선을 노린 정몽준 회장을 상대로 허승표 이사장이 도전장을 던졌다.
허 이사장은 최순영 회장 시절 국제담당 이사(1980 ~89)와 김우중 회장 시절 국제담당 부회장(1991~92)을 역임한 협회의 대표적인 국제통이었으나 정몽준 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협회를 떠났다. 하지만 4년 뒤 축구계 야당 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로 정 회장에 맞서게 된 것이다.
이후 허 이사장은 사업에만 전념했으나 안팍에서 협회 개혁의 바람이 거셌던 2004년 말 한국축구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축구의 현안을 분석하면서 실질적인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겠다는 의도가 바탕이었다. 1997년에는 의욕만 앞섰을 뿐 지지세력을 조직화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있었다. 차기 회장직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리고 2009년, 허 이사장은 다시 출사표를 던지며 사상 세 번째 경선 구도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정몽준 회장이 이뤄 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한국 축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조중연 부회장을 상대하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쉽지 않다. 조 부회장은 정몽준 회장이 16년 동안 탄탄하게 다진 축구계 여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제 51대 회장 선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전 두 차례 경선이 ‘축구인-비축구인 출신’의 대결 구도였다면 처음으로 축구인 출신끼리 회장직을 다투게 됐기 때문이다. 누가 되든 축구인 출신이 협회 수장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조 부회장과 허 이사장이 유념해야 할 점이 나온다. 선거 후 ‘정치판과 다를 게 뭐 있어’ ‘저래서 축구인은 안돼’ 등의 비아냥과 질타가 나오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돈 살포에 선거 제도의 불공정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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