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는 철저한 마이너스 사고의 소유자였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준비하는 것이 장수의 기본이라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하고 있다.
즉 어떤 방식의 용병이 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어떤 방식의 용병이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방식과는 정반대의 사고다. '누가 어떻게 해주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제3자의 관점이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있지 않는 관객들이 할 수 있는 예상일 뿐이다.
장수는 달라야 한다.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듯 외롭고 고단한 작업이다. 허나 그 고뇌의 시간이 있어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도자로 꼽히는 나폴레옹에게서도 같은 성향을 읽을 수 있다.
나폴레옹의 전쟁 금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부대의 최고 지휘관은 항상 '만약 적군이 정면에서, 우측에서, 혹은 좌측에서 공격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만약 이런 질문에 대해 현재의 배치 상태가 완벽하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부대배치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나만큼 소심한 사람도 없다. 나는 작전을 계획할 때 지나칠 정도로 위험을 가정하고 상황을 불리하게 관찰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상한 흥분을 느낀다.
나폴레옹 역시 최악의 상황을 늘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고로는 범접하기 힘든, 때문에 누구의 이해도 구하기 힘든, 외로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을 통해 그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SK엔 마이너스 사고 주의자가 3명이다. 김성근 감독이 가장 큰 그림을 그리고 김정준 코치가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필드에선 박경완이 풀어나간다.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되면 우승하지 못한다"를 먼저 고민한다. 이어 김정준 코치가 "이렇게 되면 경기에서 진다"를 걱정하고, 박경완은 "이 타자에겐 이렇게 하면 맞는다"를 근심하는 순서다.
김 코치는 "마이너스 사고란 '이렇게 하면 이긴다' 보다 '이렇게 하면 진다'를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잘 던지고 누가 잘 치면 이긴다의 사고가 아니라 누가 못하면 진다의 개념을 먼저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SK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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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경기는 스코어로 확인할 때와 경기를 봤을 때, 하이라이트로 구성했을 때가 모두 다른 느낌을 준다.
스코어만 보면 완승이지만 경기를 보면 SK가 썩 잘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이라이트는 한 술 더 뜬다. SK가 점수를 낸 상황보다 상대 공격이 더 많이 나온다.
위기가 많았지만 결국 무너지지는 않은 경기가 많다는 의미다. 이 역시 박경완의 리드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시나리오다.
준비하지 않는 팀은 없다. 모든 팀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시즌과 경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세상은, 특히 야구는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 마이너스 사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위기가 왔을 때 대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A가 10승 이상을 해주고 B는 지난해 정도만 해준다면... 이란 개념에서 출발한 준비는 A가 부상을 당하고 B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해법을 찾기 어렵다.
결국 시즌을 구상하고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은 같다. 하지만 승리의 길을 찾는 것과 지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그 작은 차이가 마지막 결승점에 다다랐을 즈음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김성근 감독은 2011시즌을 준비하며 "투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SK의 팀 평균 자책점은 3.71에 불과했다. 8개 팀 중 가장 빼어난 수치다.
하지만 김 감독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믿지 않는다. "마비 증세로 쓰러졌던 김광현이 정상적으로 개막전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고, 투수들의 보직도 확정단계가 아니다. 또 정우람은 격년제로 슬럼프를 겪는 패턴을 보였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다.
유독 최근의 SK 관련 기사에서 김 감독이 신인급 투수들을 많이 지도하고 있다는 뉴스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김광현은 최근 재검진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정우람 역시 해마다 기복의 폭을 줄여가고 있다. 하지만 김 감독의 생각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마이너스 사고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선수들의 동요를 최소화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앓는 소리는 경기가 시작되기전 까지만 해당된다. 경기 중엔 어떤 위기가 와도 표정과 행동에 변화가 없다.
패배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 장수의 행동까지 흔들리면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를 상실한다. 하지만 마이너스 사고는 최악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흔들림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이미 머릿속에 그려 본 상황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사고는 승리의 순간에도 역시 쉽게 움직이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마이너스 사고가 가진 가장 큰 위력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ID 야구의 창시자인 노무라 전 감독은 "승리에는 이유가 없어도 패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말을 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 보다는 패배에서 찾은 원인을 바탕으로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팀이 극적으로 위기를 넘겨도, 거침없는 연승을 내달려도 SK의 마이너스 사고는 흔들리지 않는다.
박경완은 숱하게 많은 위기 상황을 넘기고, 마지막 승리의 공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기쁨을 표시할 때는 1년에 단 한번, 한국시리즈서 마지막 타자를 잡아냈을 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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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SK와 KIA의 한국시리즈 한국시리즈 7차전 5회말 2사 만루. SK 포수 정상호는 이승호와 짝을 맞춰 KIA 이용규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김정준 코치는 슬며시 정상호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아직 3-1이야. 좀 천천히 해도 돼."
리드를 지켜낸 최상의 볼배합이었다. 하지만 작은 성취에 대한 큰 기쁨은 오히려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위기에 대한 공포심을 더욱 크게 만들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호는 그해 박경완의 부상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냈다. 그의 준비과정과 땀을 인정했기에 누구도 경기 중엔 그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 때가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작은 포수의 몸 동작 하나가 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걱정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기는 KIA의 역전승으로 마무리 됐다.
김 코치는 "마이너스 사고는 감정 관리를 냉정하게 해 준다. 판단의 기복이 적어질 수 있다. 최악을 가정해 두고 있으니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위기가 왔을 때 그 상황서 베스트를 찾는 것이다. 그런 것이 쌓이면 오히려 좋은 방향을 빨리 찾을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기는 패를 먼저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 방법을 만들어 두는 것이 SK 야구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그 발상의 차이가 결국 결과를 바꾸는 것이다. 그건 야구 뿐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 시리즈가 SK의 지지 않는 야구를 탐험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