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불패의 병법](10)계획은 실패한다. 그러니 계획하라

정철우 기자I 2011.02.01 11:37:15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먼저 전장에 임하여 적을 기다리면 여유가 있고 뒤늦게 전장에 임하여 적을 쫓는 입장에 서게 되면 피로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적을 나의 의도대로 이끌되 적의 의도에 내가 이끌려 가지 않는다. 적으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 오게 하는 것은 적에게 이로움이 있는 것처럼 내가 행동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적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적으로 하여금 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내가 행동하는 것이다. 적이 편안하면 피로하게 만들고 적의 식량사정이 좋으면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며 적이 안정되어 있으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전략이라 함은 단순히 싸움의 기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치고 어느 곳을 막아야 이긴다는 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계획을 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런 말을 했다. "승부에 들어간 뒤 승패를 가르는 건 3할에 불과하다. 승부는 이미 들어가기 전에 갈리는 것이다."

상대를 피로하게 만들고 안정감을 흐트릴 수 있는 전략. 손자 역시 싸움이 시작되기 전 어떤 계획을 짜느냐가 승.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지목했다.
▲ 훈련에 앞서 미팅 중인 SK 선수들. 사진=SK 와이번스
프로야구에선 3연전이 시작되기 전, 그리고 경기 전 전력 분석 미팅을 한다. 이기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이미 승부가 갈리는 시발점을 의미한다.

SK의 미팅은 3단계로 이뤄진다. 우선 감독이 데이터와 현재 팀 상황을 바탕으로 오더를 짠다. 전력분석팀은 이 오더를 중심으로 그날의 대응법을 설명하는 미팅을 열고, 그 자료와 과정을 통해 선수들은 싸울 준비를 마친다.

미팅의 핵심은 참가에 있다. 경기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플레이에 대한 점검인 만큼 모든 구성원이 하나가 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감독은 미팅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전력분석팀은 그 폭을 좁혀 적절하고 쉬운 언어로 선수들에게 전달한다. 마지막으로는 이 정보를 전달 받은 선수들의 선택이 뒤따른다. 공 하나의 승부, 그 속엔 모든 준비와 계획의 집약돼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가지 있다.

SK는 '전력분석의 팀'으로도 불린다. 마치 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작전과 수비 시프트는 상대의 숨통을 조인다. 그런 이미지는 상대팀이 SK를 지나치게 의식해 먼저 무너지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이 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력분석과 미팅의 한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팀이 SK다. SK가 세운 계획의 가장 큰 테마는 "계획은 결국 세운대로 가지 않는다"이다. 역설적으로 실패할 것을 알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전력분석팀 수장이기도 한 김정준 코치는 "야구 속엔 수없이 많은 변수가 있다. 흔한 말로 배트는 둥글고 공도 둥글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는 하지만 절대 계획은 세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계획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생각하는 전력 분석이란 "이런 볼 카운트에선 이런 공을 쳐라", "이 타자의 약점은 몸쪽이니 몸쪽을 공략하라"는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SK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을 쓴다. '단순화'는 전력 분석의 한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역으로 깊은 수렁에 빠진 채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실패했을 때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A라는 선수가 있다. 바깥쪽 공에 약점이 있다. 계획대로라면 바깥쪽 공략으로 이 선수를 잡아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럴까. 확률은 높을 수 있지만 바깥쪽 공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다. 상대가 작심하고 노리고 들어올 수도 있고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될 수 있다.

계획이 실패를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깥쪽을 공략 당했으면 왜 그렇게 됐는지, 빗맞은 타구였다면 다음 승부에서 또 활용해도 되는지가 그려져야 한다.

계획은 단순히 눈 앞의 승.패를 좌우하는 수단이 아니다. 실패 속에서 길을 찾고 데이터를 쌓아 결국 마지막 순간에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김 코치는 "공 하나, 타자 하나, 이닝하나, 게임 하나, 3연전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시즌이 된다. 공 하나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 계획이 무산되더라도 경기 안에서 반전 카드를 찾을 수 있다. 혹 그 경기를 패하더라도 다음 경기, 다음 대결에선 이길 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그런 과정이 모여 단기전의 전략이 되는 것이다. 미팅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은 어렵게, 우리는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결과가 나온 뒤 "멍청한 놈, 거기서 바깥쪽을 노렸어야지"라고 꾸짖는 팀과 "거기서 그걸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어? 확실해?"라고 묻는 팀은 결국 마지막 승부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주입식 교육은 정답 이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폐해를 낳는다. 야구 역시 마찬가지다. 뭘 노리고 뭘 던지는 건 가장 단순한 계획일 뿐이다. 그 속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때 또 다른 대응이 나올 수 있다.

결국 마지막에 해결하는 것은 선수이기 때문이다. 경기 전 미팅에서 승부구로 삼았던 공이라 하더라도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근 감독과 SK 전력 분석팀이 박경완을 '최고'라 하는 것은 계획대로 잘 따라해서가 아니라 계획의 의미를 이해하고 또 다른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박경완도 실패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늘 존중 받는다.

김 코치는 이를 흑백 TV와 컬러 TV로 비교해 설명했다.

"야구에서 흑백TV는 단순한 승패만을 의미한다. 컬러TV는 그 외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컬러 안에도 흑과 백은 있다. 하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그 단계에 머물 뿐이다. 결국 감독과 전력분석팀, 여기에 선수들이 참여하며 큰 그림을 만들어가는 것이 계획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지만 계획은 실패하게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버릴 건 버리고 지킬 건 지킬 수 있다."

SK는 3연전을 모두 내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3연패를 당하면 다음 3연전에선 반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계획의 업그레이드가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감독과 전력분석팀의 의도에 대한 선수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지난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 SK는 조동화의 극적인 다이빙 캐치 덕에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조동화는 덕아웃의 시프트 지시와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경기의 흐름을 읽은 조동화의 판단이었고 그 결과는 대 성공으로 매조지됐다.

감독과 전력분석팀은 그간 수없이 쌓아 온 데이터를 통해 타자의 성향을 분석해왔고 이를 선수들에게 전수했다. SK 선수들은 왜 그런 결정이 도출됐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계획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SK는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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