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는 제라르 드 파르디외 주연의 1982년작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남편이 집을 떠났다.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홀연히 돌아 온다. 그래서 다시 행복한 삶을 살아 간다. 하지만 이 남편은 남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남편 행세를 해 온 것이다. 이에 비해 ‘프란츠’는 이야기의 궤적이 전혀 다른 영화다. 일단 1차 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여자의 애인이 전사했고 그 애인과 예전에 친구였다는 남자가 찾아 오면서 벌어지는 얘기다.
어쨌든 ‘프란츠’의 아드리엥(피에르 니니)도 죽은 애인이 아니다. 그런데 잠깐 애인처럼 된다. 아니 그런 척 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착각을 준다. 이 모든 일은 어느 날 프랑스 남자 아드리엥이 독일 여인 안나(폴라 비어)의 죽은 애인 프란츠(안톤 폰 루케)의 무덤 앞에 나타나면서 벌어진다. 아드리엥은 안나와 (안나의 시부모가 될 뻔한) 프란츠의 부모 호프마이스터 부부(에른스트 스퇴츠너, 마리 그루버)앞에 나타나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다. 프란츠는 1차 대전에 나가 전사했다. 아드리엥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 프란츠가 파리에서 지낼 때 만난 프랑스 친구라고 했다. 아드리엥은 점차 프란츠 대신 안나의 마음 속을 파고든다. 프란츠의 부모도 아드리엥이 안나와 계속 ‘함께 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비밀이 담겨져 있고 거짓말과 거짓말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영화 ‘프란츠’는 결국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는, 사람의 과거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많은 오해와 풀리지 않는 비밀, 아니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은 거짓말로 점철돼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명은 늘 베일 속에서 움직인다.
안나는 결국 아드리엥의 비밀을 알아 낸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거짓말을 위해 스스로 거짓을 꾸며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신이 왜 그러는지 그녀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괴롭다. 다만 모든 사람들, 특히 프란츠의 부모가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그게 꼭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드리엥이 보내 온 편지를 거짓으로 꾸며 부모한테 읽어주기 까지 한다.
이건 선의의 거짓말일까. 아니면 모든 일을 더욱 더 질곡(桎梏)에 빠뜨리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한 것일까. 마음 속이 갈기갈기, 괴로워서 죽을 것 같은 안나는 신부를 찾아 가 모든 것을 고백한다. 고해성사 실의 신부는 늘 그렇듯,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안나에게 되묻는다. “진실을 알린다 한들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모든 것을 용서 하시오. 예수가 그랬듯이. 이제 그 청년을 용서 하시오.”
|
호프마이스터 박사는 프랑스 청년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는 마을 남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프랑스의 아들들이 죽었을 때 우리들은 축배를 들었소. 우리들의 아들이 죽었을 때 저쪽에서도 축배를 들었소. 우리 모두는 아들의 죽음에 축배를 들었던 아버지들이오.”
용서는 자각과 반성에서 온다. 역사적 용서는 개인의 용서에서 온다. 아드리엥을 받아 들이면서 호프마이스터 부부에게는 비로소 아들을 떠나 보낼 수 있게 된다. 아드리엥을 받아 들이게 되면서 안나 역시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것이다. 관계는 원래부터 꼬여 있거나 늘 꼬여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밀과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며 이 비밀과 거짓말을 어떻게, 얼마만큼 슬기롭게 이용하느냐, 또 그것을 두고 때론 슬쩍 눈감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세상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삶의 의지란 모든 비밀과 거짓말을 능가하는 것이다. 안나가 선택하는 것 역시 바로 그 부분에서 찾아진다.
|
오종의 영화는 늘 그렇게 우연이 필연이 되고 필연이 우연이 되는 거짓말의 관계들로 가득 차 있다. 오종이 느끼기에 세상은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본질은 거짓말이다. 행복한 거짓말일 수 있거나 행복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가 있다. 그 거짓말은 거짓말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본색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오종의 영화, 특히 이번 영화 ‘프란츠’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
영화 ‘프란츠’가 애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어떻게든, 그리고 안나처럼, 늘 새롭게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가야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것이다. 만고의 진리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 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