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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오스트리아)=데일리 SPN 송지훈 객원기자] 전반33분 스페인 중앙MF 사비가 독일의 위험지역 안쪽으로 스루패스를 찔러넣자 볼 근처에 있던 F.토레스(스페인)와 P.람(독일) 사이에서 치열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은 두 선수 모두 같았겠지만 선택한 방법은 달랐다. 람이 달려 나오는 동료 골키퍼 J.레흐만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며 몸싸움에 주력한 반면, 토레스는 슈팅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찰나의 장면이었고 순간적인 판단이었으나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람을 제친 토레스가 시도한 감각적인 땅볼 슈팅은 레흐만을 지나 텅 빈 골대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결국 이 경기의 결승골이 됐다.
‘무적함대’ 스페인이 ‘전차군단’ 독일을 물리치고 유로2008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승자에겐 유로 64이후 44년 만에 메이저대회 정상 탈환을 가능케 한 역사적인 상황으로, 패자에겐 천추의 한을 남긴 아쉬운 기억으로 남을 장면이기도 하다. 전반 내내 줄곧 팽팽하게 이어지던 양 팀의 기세 싸움이 후반 들어 일방적인 스페인의 흐름으로 기운 것 또한 첫 골 이후 시도한 다양한 변화에 따른 결과이기에 더욱 중요한 순간이다.
단 한 골로 승부가 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반 내내 양 팀의 맞대결은 흥미진진하게 전개됐다. 독일은 플레이메이커 M.발라크의 조율 아래 지속적으로 측면을 파고들며 공격의 물꼬를 틔웠고, 스페인은 2~3명이 꾸준히 참여하는 수준급 패스워크로 맞섰다. 본선참가국 중 평균 신장과 체중이 2번째로 큰 팀(독일)은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시도하며 상대를 위협한 반면, 가장 작고 가벼운 팀(스페인)은 빠른 2선 침투와 개인기로 상대를 따돌리는데 주력했다. 적어도 토레스가 첫 골을 터뜨리기 전까진 우와 열은 가늠키 어려웠고 섣부른 예상도 쉽지 않았다.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저울추가 스페인 쪽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한 건 후반 들어서부터였다. 독일 날개 자원 L.포돌스키와 B.슈바인슈타이거가 스페인의 협력수비에 가로막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측면 수비수 람이 부상을 당해 M.얀센으로 교체되면서 전차군단의 창끝은 눈에 띄게 무디어졌다.
팀 내에서 유일하게 터치라인 부근을 활발히 넘나들던 람이 이탈한 이후 독일은 특유의 ‘측면 돌파-헤딩 슈팅’ 공식을 더 이상 가동할 수 없게 됐고,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얀센과 A.프리드리히 등 좌우 풀백자원이 간간이 오버래핑을 시도하며 공격에 가담하려 노력했지만 스피드와 크로스 정확성이 기대에 못 미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발라크가 적극적으로 공격루트 개척을 위해 노력했지만 시종일관 밀집대형을 유지한 스페인 수비라인을 뚫어내기엔 힘이 부쳤다. K.쿠라니와 M.고메스 등 후반 교체 투입된 공격자원들 역시 후방에서 제대로 된 패스가 넘어오지 않은 까닭에 이렇다 할 슈팅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반면 스페인은 1-0으로 리드하던 상황에서도 ‘잠그는’ 전술 대신 공격적인 플레이스타일을 유지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나 후반 초반 들어 수비라인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고 삼선의 간격을 촘촘히 유지한 것이 성공을 거뒀다. 독일이 공을 잡으면 스페인 4백라인은 자연스럽게 자기 진영 중간 이상 부분까지 진출해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관련해 수비수들이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난다 싶으면 센터백 푸욜이 몸짓으로 주변 동료들의 전진을 촉구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는 ‘독일의 측면 활용 능력이 눈에 띄게 낮아진 만큼 주 출입구 격인 중앙을 봉쇄하면 손쉽게 상대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라고네스 감독의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후반 들어 경기 흐름을 장악하는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독일 선수들이 이전 경기와 달리 유난히 패스미스가 많았던 것 또한 촘촘한 상대 수비라인을 뚫어내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맞대결을 앞두고 상대 전력에 대해 철저히 연구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유로2008은 44년 만에 스페인을 주인공으로 탄생시키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현장을 찾은 언론매체와 축구전문가들에겐 기실 이제부터가 진정한 도전과 과제의 시작이다. 무적함대의 우승 비결을 현대축구의 다양한 기조와 견줘 새로운 트렌드의 등장 여부와 성공 가능성 등을 다각도로 판별해내야 하는 까닭이다.
독일 제압에 유용하게 쓰인 스페인의 승리 공식은 과연 유로2004를 제패한 그리스의 경우처럼 축구 발전사의 흐름을 뒤흔드는 의미 있는 결과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젊은 선수들 위주의 매력적인 스쿼드로 거듭난 ‘챔피언’ 스페인의 향후 행보와 더불어 주의 깊게 지켜볼만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베스트 일레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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