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스포츠 키즈가 온다

정철우 기자I 2013.01.29 12:33:54
박찬호가 류현진에게 그립을 설명하는 모습(왼쪽). 박세리가 ‘세리 키즈’인 양수진 김자영 최나연(박세리 기준 시계방향)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데일리 스타in 정철우 기자]대한민국이 IMF(국제통화기금)라는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던 지난 1998년 여름. 실직자 가족은 거리로 내쳐졌고, 간신히 밥 줄을 잡고 있던 사람들도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해고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간. 그때 우리에게 손을 내민 영웅들이 있었다.

박세리는 1998년 LPGA 최고 권위의 US오픈에서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연못에 빠진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자 드러난 하얀 발은 계속된 훈련으로 검게 그을린 그의 허벅지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했었다.

골프에 박세리가 있었다면 야구엔 박찬호가 있었다. 1996년 메이저리그서 첫 승을 거둔 박찬호는 1997년부터 풀 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하며 당당하게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를 꿰찼다. 박세리가 등장한 1998년엔 메이저리그 특급 선발의 기준인 15승을 넘어서는 쾌거를 이뤘다.

160km에 육박하는 묵직한 직구가 꿈틀 거리며 포수 미트로 향하면 야구의 신들처럼 보이던 메이저리거들의 방망이가 맥없이 춤을 추며 헛돌았다. 삼진을 잡은 뒤 짧게 내리 쥐던 그의 주먹은 우리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 했다.

스포츠 키즈의 탄생

당시 언론은 연일 박세리와 박찬호를 쫓았다. 그리고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는 뉴스 꼭지 중 하나가 ‘박세리 열풍, 골프 키즈 늘어났다’, ‘박찬호를 통해 메이저리그를 꿈꾼다’였다. 많은 사람들이 콧방귀를 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운동은 무슨…” 그저 화제만 쫓는 언론의 호들갑이라고만 여겨졌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뒤, 세상엔 실제로 ‘박세리, 박찬호 키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저 나타난 것 만이 아니다. 한국을 너머 세계 스포츠를 뒤흔들었다. 골프에선 박인비 최나연 유소연 신지애 등이 그 주인공이다. 박인비 지은희 유소연, 최나연 등은 박세리가 처음 세상을 품었던 그 대회, US오픈을 정복하며 역사를 이어갔다. 야구에선 류현진 윤석민 김광현 등이 한국 무대 평정 후 국제대회서 맹위를 떨쳤고, 이제는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했거나 입단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바야흐로 스포츠 키즈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축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계기가 됐다. 카드 대란이로 또 한번 휘청이던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신화와 함께 다시 설 수 있었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 축구 무대에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망주들이 꿈의 무대인 유럽 리그에 진출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지난 2009년 함부르크 유소년팀에 입단, 이제는 팀의 주축 공격수로 성장한 손흥민이 대표적인 예다. 얼마 전 시즌 7호골을 성공시킨 손흥민은 이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 질 스트라이커로 자라나고 있다. 스포츠 키즈는 이처럼 앞선 영웅들이 만들어 놓은 길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다.

박세리가 LPGA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리며 한국 골프의 위상이 올라간 덕에 한국은 LPGA대회를 공식 유치하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우리 골퍼들은 이 대회를 통해 LPGA에 직행할 수 있는 기회(LPGA대회 우승자는 시즌 출전권 보장)를 얻게 됐다.

박찬호는 직접 장학금을 만들어 유망주들을 후원했다. 배영수(삼성) 김태균(한화) 정상호(SK) 이범호(KIA) 등이 혜택을 받았던 주인공들. 이들이 지탱해 온 한국 야구의 인기는 국제대회를 통해 그 성과를 높일 수 있었고, 결국 박찬호 키즈인 류현진 윤석민 김광현 등이 맘껏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왜 다시 스포츠 영웅인가

스포츠 키즈들의 성장에 또 한번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가 처한 위기상황 때문이다. 2013년 한국 사회는 미국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세계 경제 위기가 언제든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공포 아래 놓여있다.

요동치는 물가를 언제까지 따라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며 끝 모르고 추락하는 부동산 가격은 하우스 푸어를 양산하고 있다.

실질적인 위기보다 더 큰 적은 ‘두려움’이다. 당장의 어려움 보다 닥쳐올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돈 줄을 죄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세리와 박찬호, 그리고 2002년의 월드컵을 통해 태어난 스포츠 키즈는 이런 두려움을 걷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10여년 전, 그들을 통해 희망을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처럼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스포츠 영웅들의 발자국은 또 한번의 희망 메신저가 될 것이다.

실제로 지난 1980년 심각한 경제 위기에 놓였던 서독은 동시대에 등장한 테니스 스타 보리스 베커와 스테피 그라프를 전략적으로 띄우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언론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더 집중했고, 독일 전체가 열광했다.

100년을 지켜 온 독일 최고 인기 스포츠 축구도, 둘 앞에선 맥없이 무너졌을 정도다. 체육학계는 당시 베커와 그라프가 꿈을 잃은 독일 국민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해주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영웅은 가치를 창출한다

스포츠 영웅들은 단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만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산업으로서 가치를 창출한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한양대 스포츠 산업 마케팅센터에 의뢰해 조사한 김연아의 경제적 가치는 무려 5조2천억원을 넘었다. 또한 포천지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이 그동안 미국 경제에 공헌한 효과가 무려 100억 달러(약 11조원)이라고 추산했다.

고용 및 생산 창출 효과는 물론 막혔던 돈의 흐름을 뚫는 기증까지 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다.

실제로 지난 2008년 만년 꼴찌였던 롯데는 8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부산발전연구원에 따르면 그해 롯데 홈경기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무려 1500억 원 이상이었다. 생산유발 효과가 1106억 원이며 취업유발 효과도 2392명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원 측은 중소기업 10개를 만들고 승용차 5000대 이상을 수출하는 효과와 같다고 밝혔다.

롯데 야구가 침체된 부산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하나의 효자 상품이 됐음을 의미한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위기의 시대. 스포츠 키즈들의 등장이 또 한번 대한민국의 기운을 되살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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