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모두 위험한 상태" 최준희 양 페북 글 놓고 측근 호소

고규대 기자I 2017.08.05 11:28:11

최준희 양 측근 김대오 기자 "지금 말을 아껴야 할 때"

고(故) 최진실의 딸 최준희 양.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진실을 위해서라도 지금 말을 아껴야 할 때다.”

고(故) 최진실의 딸 최준희 양이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외할머니의 폭언과 폭행에 대한 주장을 담은 글을 올리면서 주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준희 양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외할머니와 갈등을 대외적으로 알릴 방법을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오랜 준비와 고민의 결과라는 것.

최준희 양은 페이스북 글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도왔던 인물로 이모 할머니 외에 홍진경·이영자 그리고 그의 어머니 고 최진실과 생전 절친했던 김대오 기자 등을 언급했다. 이들은 10년 남짓 외할머니와 최준희 양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해결책을 내내 찾았다. 고 최진실의 측근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족 모두가 받지 않았겠느냐. 무엇보다 환희와 준희 두 자녀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필요했을 시기였는데, 외할머니와의 갈등 등으로 주위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져갔다”고 전했다. 김대오 기자는 이데일리 스타in과 전화통화에서 “해야할 말은 많지만, 지금 당사자 모두 위험한 상태”라고 말을 아꼈다. 또 “진실을 위해서라도 지금 말을 아껴야할 때다”고 말했다. 진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고 최진실을 지칭하는 말이냐는 말에 “중의적 단어”라고 부연했다.

앞서 최준희 양은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 일생에 대해 폭로하고자 고민 끝에 용기 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려 합니다’라며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최준희 양은 해당 글이 화제가 되자 댓글을 통해 “이 글에 대한 변명거리도 외할머니가 분명 이야기할 것”이라며 “이 글이 무조건 동정을 받고 비난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저는 조금의 사람들이라도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또한 “저는 집에서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고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준희 양이 올린 글의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고 최진실의 딸인 최준희입니다. 제가 갑작스레 이글을 적게 된 이유는 잘 살고 있었을 것만 같던 제 일생에 대하여 폭로하고자 고민 끝에 용기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가려 합니다.

현재 저는 중학교 2학년이고 아마 제 일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부터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고 보자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엄마가 떠난 이후로 불행하게 살 줄 알았던 저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그저 지극히 평범하게 학교 다녀와서 스폰지밥을 보고 싶어하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저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외할머니, 오빠, 이모할머니, 친가네 이 정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외할머니랑 살지 않고 같이 살고 있는 이모할머니는 누구인가에 대해 에스크를 올렸을 때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셔서 알려드리자면 이모할머니는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제가 태어나자마자 키워주셨고 다른 부모님들 못지않게 자랑스럽게 키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사실상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오빠만 예뻐하고 키우기 바빴습니다. 그런 저에게 사랑을 주고 저를 위해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오직 저 최준희를 위해 살아오신 분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얘기를 이어가자면 외할머니는 이모할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나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이모할머니가 제 재산을 노리고 키운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하시더군요. 그렇게 11년 동안 함께 살붙이며 살아온 이모할머니를 갑자기 강제로 못 보게 한 것이 바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입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5일 자면 오겠지, 10일 자면 오겠지 했지만 끝내 어느 날부터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11살이라는 나이에 제일 사랑하던 가족과 이별을 경험했고 며칠 뒤에 외할머니는 충격에 빠져 있던 저에게 뻔뻔하게도 “너랑 그년이(이모할머니)랑 같이 있는 꼴을 못보겠어서 내가 그냥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 너 그년이랑 있으면 네 인성 다 망쳐”라며 너무나도 어렸던 저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우울증에 걸려 안 우는 날 없이 밤마다 외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잠들고 하루 일과라면 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큰 곰인형에 이모할머니가 들고 가지 못한 옷과 안경, 향수 양말들을 입혀 꼬옥 껴안고 잤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잔인하게도 그 인형을 집어던지며 이모할머니의 물건들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전 너무 무서웠고 이모할머니랑 제가 뭘 이렇게 잘못했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는 정신적으로 멘탈이 다 산산조각났고 용기내어 이모할머니에게 연락을 해보려 외할머니 몰래 카카오톡으로 연락을했습니다. 운 좋게도 이모할머니에게 연락이 바로 닿았고 이모할머니는 그저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네가 빨리 성인이 되고 커야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며 답장을 했고 전 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전 거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 핸드폰이 없어져 있었습니다. 몇 분 뒤 외할머니는 저에게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시며 “너 비밀번호(패턴) 해놓는다고 못 풀 줄알아? 이모할머니랑 연락하는 거 다 알아”라고 말씀하시며 수시로 제 핸드폰 검사를 하셨고 조금 의심의 여지가 있었을 땐 그저 말없이 가져가서 돌려주시질 않으셨습니다

몇 주 뒤 전 당시 성악부였고 성악부 담당 선생님께서 제 사정을 알아 이모할머니께 연락을 드려서 이모할머니가 학교로 몰래 찾아와 달고나, 산딸기 등 제가 어렸을 때부터 즐겨 먹던 음식들을 챙겨왔습니다. 전 먹는 내내 이모할머니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웃음으로 대신했고 행복은 그저 거기까지였습니다.

며칠 후 이모할머니가 학교로 찾아오는 건 외할머니가 어떻게 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해 준희랑 이모할머니 못 만나게 하라고 시켰고 선생님들께서도 제 사정을 다 아시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때 이후 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그저 이모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우울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할머니의 윽박과 폭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학교에서 전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더 의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겨 그나마 버틸만했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저에게 남자에 미쳤냐며 상처를 주셨고 어느 날은 크게 말다툼이 일어나 저를 옷걸이로 때리려고 하셔서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근데 갑자기 제 손을 무셨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는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는 게 아니었고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았고 정말 그냥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해방법은 있는 데로 다해보았습니다. 커터 칼로 손목도 그어 보았고 샤워기로 목도 매달아보고 하지만 살고 싶은 의지가 조금 있었는지 항상 실패했고 그때마다 흉터만 남고 결국 전 죽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할머니께서 제 유서를 발견하시고 저에게 유서를 왜 썼냐며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전 그때까지 만해도 “아 할머니가 그래도 나를 걱정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으나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유서에 외할머니를 쓰지 않고 오빠와 이모할머니에게만 썼다는 이유로 화를 내셨고 또 폭행을 하셨습니다.

더 심했던 것은 북유럽으로 저랑 오빠랑 외할머니랑 가족여행을 갔었을 때 갑자기 외할머니가 저를 방으로 부르시더니 저는 엄마가 잘못 낳았다고 하시고 옷걸이로 절 때리시고 목을 조르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당황스러운 것은 외할머니께서 “네가 그때 말을 안 들어서 훈육을 한 것 뿐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그냥 장난으로 그런거에요”라고 해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유서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외할머니께서 절 못 키우겠다 하시면서 미국으로 갈래 이모할머니한테 갈래라고 2가지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허나 이모할머니한테 갈 경우 생활비를 10원도 주지 않겠다 말씀하셨고 마음만은 이모할머니에게 가고 싶었지만 미래를 생각하여 미국으로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 후 제가 엄마의 공로상을 받았고 아무도 모르게 유학준비를 차근차근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당시 MBC 다큐 사랑을 찍고 있었습니다 방송에는 정말 노력하고 행복 해보이는 장면으로 연출됐을지 몰라도 전 정말 괴로웠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진경 이모와 신라호텔에서 외식을 했고 전 몰래 진경 이모에게 가기 싫은 눈치를 주었고 진경 이모는 제 편을 들어주며 안 가면 좋겠다는 쪽으로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 이후로 진경 이모 욕을 하며 걔네가 뭔데 참견하고 지랄이냐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다음은 영자이모가 김대오 기자 등 여기저기 얘기를 했고 준희를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다가 친가네로 연락을 했고 친할아버지께서는 “조씨도 아니고 우리 손자 손녀 아니니까 신경 안 쓸껍니다”라며 무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을 때 전 아는 집에 맡겨지기로 했으나 거의 입양수준이었고 더 심각했던 건 제가 머물러야 했던 집은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불안정한 상태의 가정이었고 전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더 겁이 났습니다.

결국 미국으로 떠났고 가서도 휴먼다큐 사랑을 촬영했으며 거기서 다닐 학교도 보니깐 이상한 사이비종교로 이루어진 학교였습니다. 전 더 겁이 났고 내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의심만 커져갔습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할머니한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런데 왠일로 할머니가 오랜 고민 끝에 다시 한국으로 가자고 해서 모든 계획은 다 파토가 났고 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전 할머니의 원망이란 원망은 다 들었고, 전 다시 숭의초등학교를 다니려 했으나 유학절차가 아닌 퇴학절차로 해서 다시 초등학교를 재학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전 몇 달 동안 학교를 가지 않았고 할머니는 절 오빠네 국제학교로 같이 보내려 했습니다. 그동안 빡세게 공부를 시켰고 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으나 국제학교에 합격해야한다는 주위의 큰 부담 때문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치고 아플 무렵 할머니와 전쟁은 끝난 듯 했지만 다시 시작됐고 전 계속 공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아침에 전 토요일 저녁에 공부하느라 늦게 잤고 할머니는 교회 갈 준비를 하시며 화장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고 있는 저에게 자신의 아이라이너가 없어졌다며 저를 도둑으로 몰아갔습니다 . 하필이면 제일 예민하고 피곤했을 때 저를 도둑년이라 칭하며 넌 어렸을 때부터 도둑질만 했다면서 저에게 또 상처를 주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지금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새벽 1시 55분인 지금도 집안이 다 박살났습니다. 경찰들도 찾아오고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실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기에 일단 올리겠습니다. 긴 얘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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