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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방송에서는 장성규, 장도연, 장항준이 이야기꾼으로 등장해 김지혁 아나운서, 김여운, 송은이에게 1988년 TV 생중계 인질극으로 화제가 된 ‘지강헌 사건’에 대해 들려줬다.
1988년 10월 8일 미결수 25명이 타고 있던 죄수 호송버스에서 재소자 한 명이 교도관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했고 교도관이 죄수에게 소변통을 건네는 순간 재소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난투극이 벌였다. 죄수들은 교도관과 옷을 바꿔입었고 이들 중 12명은 권총, 실탄을 챙겨 탈출을 했다.
탈출한 12명 중 2명은 당일에 검거됐고 3명은 룸살롱에서 놀다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다. 남은 7명의 죄수는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 숙박을 했다.
2명의 인질은 대학병원 주차장에 침입해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인질로 잡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제작진은 당시의 인질을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질은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해 탈주범들과 2박 3일 동안 계약 동거를 택했다고 전했다. 인질은 탈주범들과 술도 마셨다. 이때 탈주범들은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으며 홀대, 냉대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다고 고백했다. 지강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다 차별, 상처를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이 꿈이었다는 지강헌은 “난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지강헌은 “대한민국의 비리를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며 “연희궁으로 가려다 경비가 심해서 그만뒀다”고 탈주를 한 이유를 전했다. 지강헌은 연희궁을 찾아 전두환을 만나려 했던 것이다.
지강헌의 죄목은 7차례 걸쳐 현금, 승용차 등 약 556만 원을 절도한 것이다. 지강헌은 이 죄목으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형량을 받았다.
전두환 정부에 만들어진 보호감호제는 재범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징역 후 감호소에 머물게 하는 것으로 징역과 다를 게 없는 제도였다. 자전거 한 대를 훔쳐도 징역 3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기도 했고 결국 2004년 이중처벌, 과잉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폐지됐다.
그러나 당시 리틀 전두환으로 불렸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재판부에서 인정한 횡력액만 76억 원이었지만 형량은 고작 7년형이었고 3년 정도 살다가 석방이 됐다.
지강헌과 다른 탈주범들은 네번째 집으로 향했고 당시 TV에서 탈주범과 관련된 뉴스를 보고 있던 22세 여대생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탈주범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밥은 먹었느냐”며 “밥부터 차려라”고 하며 긴장감이 다소 완화됐다. 어머니는 식사를 차렸고 탈주범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이후 탈주범들은 집주인의 말에 순순히 신발도 벗고 바닥도 닦았다는 설명. 이때 안정을 찾은 탈주범들은 여대생에게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라고 물었다. 마음 속으로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이후 인질은 탈주범들을 순순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성경을 읽어줄 것을 결정했다. 이때 지강헌은 여대생에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겠냐”라고 물었다. 당시 여대생이었던 인질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그래서 뭐라고 기도를 해드릴까요 했더니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둘이 같이 앉아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니까 엄청나게 울더라. 저도 울고 그분도 울고 같이 울었다”고 말했다.
탈주범들은 네 번째 집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북가좌동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집주인의 신고로 테러 특공대들을 마주했다. 또한 탈주범의 가족들까지 북가좌동으로 향했다.
담 밖에서 보면 흉악해 보였지만 집 안에서는 그 반대였다고 한다. 인질범들은 총을 겨누면서도 인질에게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없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사과를 한 것.
당시 지강헌은 승합차를 대기하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인질범 강 씨가 차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질을 붙잡고 밖으로 나왔고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와중에 지강헌이 쏜 총에 맞았다. 지강헌은 “내가 너는 살린다. 조용히 하고 내 말 들어라. 내 의견 받아들여라”며 가장 어렸던 강 씨를 달랬다.
그리고 집 안에서 안광술과 한의철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총을 쐈다. 마지막으로 홀로 남은 지강헌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려달라고 했고 그는 노래를 들으며 머리에 총을 겨눴다. 이어 다른 손으로는 유리를 집어 들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 순간 경찰 특공대가 들이닥쳐 지강헌에게 총 2발을 발사했고 그는 병원에 옮겨진 4시간 후 사망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 살아남은 탈주범 강 씨는 경찰에 검거되었다.
북가좌동 인질극의 유일한 생존자 강 씨는 선고 공판에서 징역이 15년형이 구형되었지만 7년형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인질들이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때문이었다.
인질이 그를 위해 보낸 탄원서 내용은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이들에게서 나쁜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졌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자기들이 떠나면 곧 신고를 하라며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 삼아 세상의 좋은 등대지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등이었다.
5번의 인질극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희생당하거나 다치지 않았다. 장항준은 “이들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이들의 일생이 가련하다. 밥은 먹었냐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그들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인질들의 그런 태도들이 그 다음 집의 재앙을 막았던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해외 유명 경제지에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한국에서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