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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오스트리아)=이데일리 SPN 송지훈 객원기자] 26일 오스트리아 빈(영어명 비엔나)의 에른스트-하펠 슈타디온에서 열린 러시아와 스페인의 4강전은 ‘장대비’라는 예상 밖 변수가 등장하면서 더욱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늦은 오후부터 비엔나 시내를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킥오프를 앞두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돌변했는데, 이로 인해 양 팀 공히 전반 내내 정상적인 전술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 결과는 후반기에만 세 골을 휘몰아친 스페인의 3-0 완승이었지만 갑작스런 비로 인해 양 팀 모두 적잖이 고전했다.
방향 전환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강하다 싶은 패스는 종종 빠른 속도로 라인을 벗어났다. 스페인의 주 공격옵션 D.비야가 전반34분 일찌감치 교체 아웃된 것 또한 프리킥 시도 과정에서 살짝 미끄러지며 땅을 찬 결과였다.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도 비는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전반 초반엔 스페인 선수들이 민첩성과 테크닉을 활용해 위협적인 골 찬스를 다수 양산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필드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중반 이후 개인기를 발휘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지구력과 스피드를 앞세운 러시아의 반격이 매섭게 이어졌다. 주변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각국 언론인들이 “또 한 번 흥미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감탄사를 연발한 배경이다.
‘다크호스’ 러시아대표팀이 토너먼트 과정에서 매 경기 위력적인 모습을 선보여 더욱 관심을 모은 후반전은, 그러나 의외로 45분 내내 스페인의 독무대로 진행됐다. 무엇보다도 후반5분 샤비(MF)의 선제골을 앞세워 일찌감치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이 분위기를 장악하는 비결이 됐다.
실점 직후 거스 히딩크 러시아 감독이 흐름 반전을 위해 꺼내든 ‘비장의 카드’가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한 점 또한 스페인의 질주를 부채질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I.셈쇼프, I.사엔코(이상 MF) 등 전반에 다소 부진했던 주전 멤버들을 대신해 공격지원병 역할로 투입된 D.빌리야레트디노프, D.시체프(이상 MF)가 A.이니에스타 등 스페인의 허리라인에 철저히 제압당하면서 러시아는 후반 내내 무적함대의 파상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부상당한 비야를 대신해 투입된 C.파브레가스(MF), 지난 시즌 라 리가 득점왕 출신으로 팀의 2번째 골을 성공시킨 D.구이사(FW) 등 스페인의 교체 멤버들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승리에 일조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정한 L.아라고네스 스페인 감독의 노련미 또한 돋보였다. 그라운드의 물기 탓에 무적함대 멤버들이 개인기 활용에 어려움을 겪자 아라고네스 감독은 후반 들어 드리블링을 자제하고 패스워크 위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스페인은 후반 들어 미드필더들을 중심으로 짧고 빠른 패스와 약속된 플레이로 러시아의 방어선을 여러 차례 허물었는데, 결국 이러한 찬스들이 오롯이 득점으로 연결돼 대승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한 수 위 전술 수행 능력을 앞세운 스페인의 위협적인 공격 전략은 러시아 선수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는 부가 효과도 창출했다.
러시아의 최전방 듀오 A.아르샤빈과 R.파블류첸코가 경기 내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은 건 스페인 수비진이 효율적으로 방어한 결과지만, 한편으론 후방에서 지원할 동료들이 수비에 치중하느라 역습 찬스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스페인이 거둔 승리는 선수들와 팬들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자국 축구역사를 다시 쓴 쾌거이기도 하다. 무적함대가 유럽선수권에서 결승에 오른 건 준우승을 차지한 유로84 이후 무려 24년 만이다. 만약 결승에서 전차군단 독일을 꺾고 우승을 차지할 경우 유로64 이후 44년 만에 왕좌를 되찾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간 각종 메이저대회서 꾸준히 우승 후보로 이름을 올리면서도 늘 8강 언저리에서 탈락해 ‘비운의 팀’, ‘영원한 들러리’ 등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떼어내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수준급’의 한계를 떨치고 ‘최고’로 거듭날 기회를 잡은 것이기도 하다. 비엔나를 적신 빗줄기가 러시아와 히딩크를 응원한 팬들에겐 결승행 좌절에 따른 슬픔의 눈물로 비췄을 수 있겠지만 수십 년 만에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나설 기회를 잡은 스페인에겐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던 셈이다./<베스트 일레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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