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작비 문제, 캐스팅 과정, 투자 등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수개월 전 촬영에 돌입해도 그날 찍어 그날 방송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완성된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와 달리 매주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는 드라마에선 시청자가 대본을 쓰고 화면을 찍는 웃지 못할 현실이 실현되기도 한다. 시청자들의 반응에 맞춰 캐릭터의 방향이 수정되거나 결말이 바뀌는 등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은 긍정적인 그림처럼 보이지만 ‘용두사미’나 ‘산으로 간 배’의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중요한 건 제작하는 사람들의 자신감과 책임감이다. 작품의 기획 의도가 분명하고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의 구조가 탄탄하게 짜였다면 흔들릴 이유가 없다. “사전 제작했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면 수습을 어떻게 하냐”는 걱정은 머리로는 계산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기 힘든 변명이다.
|
|
놀라운 것은 11회까지 모든 대본이 완성됐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대본이 완성된 시점이다. ‘나쁜 녀석들’의 한정훈 작가는 올초 대본을 다 썼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한정훈 작가를 비롯해 작품을 기획한 핵심 제작진 외에는 완성된 대본을 받지 못했다. 당시 대본과 현재 배우들이 외우고 있는 대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회가 방송됐을 때 수정 작업까지 마무리 됐다.
트렌드는 빠르게 바뀐다. 특히 지난해처럼 수사물, 장르물 등이 안방극장을 수놓던 때는 유행이 더욱 빠르게 소비된다.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서사 구조, 더욱 그럴듯한 반전과 복선을 위해 작가와 PD는 머리를 싸매야한다. 이 대사에 반응하지 않으면 다음 회엔 더 센 대사를 준비해야 하고, 이 액션에 흥이 덜하면 다음 회엔 혈전을 선보여야 한다.
‘나쁜 녀석들’은 실시간 반응으로부터, 모든 외부 환경에서의 자극으로부터, 빠르게 바뀌는 방송가 트렌드로부터 자유를 외쳤다. 내 작품에 대한 자신감, 그 작품을 향한 산뢰 덕에 가능했다. ‘나쁜 녀석들’의 한정훈 작가 역시 이러한 경험을 다시 없을 일로 설명했다.
|
이어 “확실히 대본을 다 써놓고 드라마를 보니 시청자 입장에서 즐길 수 있게 된다. 만약 내가 대본을 다 써놓지 않았더라면 모니터링을 할 때마다 ‘이 대사를 이렇게 살리네? 다음 회엔 더 힘을 줘야지’라거나 ‘이런 애드리브를 잘 쓰네? 그 부분을 살려줘야겠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거다. 그게 마냥 좋지도 못한 것이 작품의 전체적인 재미를 놓치거나 중심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나쁜 녀석들’이나 ‘괜찮아, 사랑이야’처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촬영 시스템이 안착되는 일은 과연 불가능할까. 많은 관계자들은 최근 작품 기획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가가 쓴 대본을 PD와 배우들에게 주고 촬영하고 연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 촬영 감독, 기획 PD, 작가 등의 팀을 이뤄 초기 단계부터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분위기로 변하고 있다.
CJ E&M 조문주 드라마제작국 프로듀서는 “요즘은 작품을 개발하는 시작 단계부터 작가와 제작진이 함께 임하는 경우가 많다. 대본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수정을 위해 추가로 시간을 지체하던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스템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