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레이스에서 처음 고개 숙인 '단거리 황제' 볼트

이석무 기자I 2017.08.06 11:17:19
6일(한국시간) 런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3위에 그친 우사인 볼트(왼쪽)가 금메달을 따낸 ‘라이벌’ 저스틴 게이틀린을 끌어안으며 축하해주고 있다. 사진=AFPBBNews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2등이 뭔지 몰랐던 ‘번개인간’ 우사인 볼트(31·자메이카)가 마지막 레이스에서 처음으로 패배 쓴맛을 봤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볼트의 패배는)가짜 뉴스가 아니다’는 기사 제목을 달았다. 그만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이변이었다.

볼트는 6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 런던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95의 기록으로 3위에 그쳤다.

항상 볼트의 등을 보고 달렸던 ‘만년 2인자’ 저스틴 게이틀린(35·미국)이 9초92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신예’ 크리스찬 콜먼(21·미국)이 9초94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볼트는 스타트부터 좋지 못했다. 이날 볼트의 스타트 반응 속도는 0.183초로 결승에 나선 8명 선수 가운데 7번째였다.

전성기 시절 볼트는 출발이 늦어도 후반에 폭발적인 가속력으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레이스 후반에도 예전같은 스피드는 나오지 않았다.

볼트의 실패는 준결승에서 어느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볼트는 준결승에서 조 2위로 결승에 진출했다. 볼트는 1위를 놓치는 것을 죽는 것 만큼 싫어한다. 예선과 준결승에서도 늘 1위로 올라선 것을 확인한 뒤 그제서야 속도를 늦춘다.

그런 볼트가 준결승에서 2위에 그쳤다는 것은 그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결승에서 온 힘을 다해 달렸지만 결과는 3위였다.

실패를 세월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단거리 선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가 전성기다. 볼트는 이제 31살에 불과하다. 볼트를 제치고 우승한 게이틀린은 35살로 볼트보다 4살이나 많다.

볼트의 발목을 잡은 가장 큰 적은 목표 상실과 훈련 부족이었다. 볼트는 지난 10년간 올림픽 금메달 8개,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11개를 휩쓸었다. 더이상 이룰 목표가 없었다. 일찌감치 은퇴를 예고할 만큼 육상은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대회에 출전하는 회수가 줄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육상 대신 축구 얘기가 주를 이뤘다. 볼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성팬으로 유명하다. “은퇴 후 맨유에 입단하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지난 4월 절친한 동료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은메달리스트 저메인 메이슨(영국)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3주 동안 훈련을 하지 못했다. 천하의 볼트도 훈련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볼트는 “출발이 부진했고, 중후반 레이스에서 만회하지 못했다”며 “이런 레이스를 펼친 것이 후회스럽다. 마지막 경기라는 걸 의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나니 마지막 100m 결승에서 이런 결과가 나와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게이틀린은 정말 훌륭한 경쟁자다. 예전부터 게이틀린과 달릴 때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게이틀린이 볼트를 이기고 금메달을 따낸 것은 너무나 극적인 스토리다.

게이틀린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등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게이틀린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2005년 헬싱키 대회 이후 무려 12년 만이다. 특히 메이저대회 결승전에서 볼트를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이틀린은 2013년 모스크바, 2015년 베이징 대회에서 볼트에 밀려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만년 2등’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아쉬움을 씻어냈다. 볼트를 이기기 위해 은퇴도 미루고 철저히 준비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게이틀린은 볼트를 이기고도 주연이 되지는 못했다.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런던 관중들은 게이틀린 대신 볼트의 이름을 연호했다. 게이틀린에게 쏟아진 것은 엄청난 야유였다.

사실 게이틀린 입장에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회에 나설 때마다 마치 히어로 영화의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연은 물론 볼트다. 금지약물 징계 전력까지 가진 게이틀린은 어디를 가든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

게이틀린은 결승전을 마치고 볼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단거리 황제’에 대한 예우였다. 동시에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씻는 그 만의 작은 세리머니이기도 했다.

게이틀린은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볼트와 경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오늘 나왔다”며 “팬들의 야유에서 벗어나고자 더 열심히 달렸다. 나를 위해 헌신한 가족과 코치들이 내게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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