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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지난 90년대 효(孝) CF로 한국광고대상까지 받은 한 보일러업체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자신은 시골에서 춥게 고생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자식 걱정에 여념이 없는 노부모는 자식들이 그리는 당연한 부모상이었고, 그런 부모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불편을 걱정하는 며느리의 효심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 신(新) 노인족-'발칙한 노인'들의 출현
그런데 요즘에는 어찌된 일인지 노인들이 TV에서 '쇼'를 하고 나섰다. 한 이동통신사 광고에서 노부부는 고장난 살림살이를 바꾸기 위해 아들에게 '쇼'를 한다. 광고 속 노부부는 입으로는 "우린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말하면서도 휴대폰으로 고장난 TV를 보여주며 연속극 옆집 가서 본다는 말을 능청스럽게 전한다.
이 광고가 파격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까지 TV 속 기존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바란 적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노인들이 소비의 주체로 자리매김 한 적은 그간 TV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노인들은 물건에 대한 소비 욕구가 없는 것 혹은 없어야 하는 것으로 그려졌으며 자식들이 해주는 것을 '효'의 개념으로 그냥 받아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바람직한 부모상으로 통했다.
뿐만 아니다. 최근 한 보험회사 광고를 보면 딸의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늙은 아내를 데리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간다. 밖에 준비된 오픈카를 타고 중년의 부부는 자유를 찾아 떠난다.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은 끝났고 이제부터 진정한 내 자유를 누릴 때가 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발칙한(?) 노인들은 CF 이전 이미 TV 시트콤에서부터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지난해 7월,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리에 종영된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이순재 분)와 '애교 문희'(나문희 분)가 그러하다. '야동 순재'는 방에서 컴퓨터로 야한 동영상을 보고, '애교 문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늙은 남편에게 콧소리 충만한 애교를 부리는 주책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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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봉합형 노인에서 자기표현형 노인으로
TV에 등장한 신(新) 노인족은 기존의 노인상과는 다르게 상대방에게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고 꿈꾼다. 90년대 TV 속에 비춰진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장본인이 아니었다. 풍경처럼 자식들 뒤에 가만히 서서 식구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맡거나 설사 자신들로 인해 자식들의 갈등이 불거졌다 해도 모두 '내 탓이오'로 일관하며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을 쏟아내는 것이 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TV 속 신(新) 노인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문제제기를 한다. CF가 보여주는 노부모들의 원초적인 소비욕구와 여가 욕구는 물론 한 공중파 TV는 잠자고 있던 노인들의 성욕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집안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는 것도 크게 망설이지 않는다. 드라마 속 '야동 순재'와 '애교 문희'도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한 점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자식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투털거리는 일을 마다치 않았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연출을 맡은 김병욱 PD는 "사실 우리 부모들은 일방적으로 강요된 모성애와 부성애로 어느 정도 억눌려 살고 있다"며 "이렇게 사회가 강요한 도식적인 노인상에서 벗어나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 PD는 이어 "물론 노인들이 젊었을 때 보다야 욕망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냐"며 "무엇인가를 여전히 바라고 꿈꾸는 것이 좀 더 현실성이 있는 노인상이라고 생각했다"고 '야동 순재'와 '애교문희'란 발칙한 노인상의 탄생 배경을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도 이제 나이가 40대 중반이고 보니 그걸 알겠더라"며 웃으며 말했다
◇ 내 인생은 자식 것이 아니라 나의 것…삶의 주체로 떠오르는 신(新) 노인족
이런 신(新)노인족이 TV 속에 출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문화연대 이동연 문화평론가는 신(新) 노인족의 출현을 "장년층의 전반적인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이 적극적인 삶의 주체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요즘의 부모들은 전반적으로 경제적 여유 속에 결혼 초반부터 자신들의 노후 대책을 강구한다. 예전처럼 자신의 노후는 생각하지 않고 집안의 소를 팔아 자식들에게 '올인' 하는 게 아니라 자식에 대한 투자와 동시에 자신의 노후에 대한 대책 마련을 하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엷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상징하기도 하며, 자신의 삶이 자식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한 위험부담을 꺼리는 반작용이기도 하다.
이런 노인들에겐 우선 자신의 건강 챙기기가 화두다. 바로 노노(NO-老族)족 현상이다. 노노족은 보디빌딩을 하고, 높은 산에 오르고, 마라톤을 즐기고, 심지어 80대 중반 노년이 4500m 이상의 고산 마라톤에서 42.195km를 완주하기도 한다. 자전거는 이미 보편화됐고 70세 이상으로만 구성된 축구단도 있다고 한다.
요즘 신(新) 노인족들의 욕구는 1차적인 몸가꾸기에서 점점 소비와 여흥이라는 2차적 정신적 욕구로 진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04년 '노인 복지욕구 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의 여유돈 우선 항목 지출 선호 항목도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지출하고 싶은 첫번째 항목은 여행, 관광, 취미 활동이 40.6%로, 건강 유지의 22%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발칙한 노인’과 젊은층은 환상의 짝꿍(?)
신(新) 노인족의 출연과 함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신(新)노인족을 바라보는 젊은층의 태도 변화에 있다. ‘쇼’ 광고를 제작한 광고 제작기획사는 "사실 '쇼' 효도 편 광고를 만들 때 노인들보다 그 변화한 노인들을 바라보는 젊은층들의 반감이 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젊은층의 반응이 호의적이서 놀랐다”고 했다.
이동연 문화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앞서 지적한 광고와 드라마의 주 소비층이 젊은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기존에 항상 윤리의 대상이었던 노인에 대한 환상이 깨지며 노인을 신적인 존재가 아닌 현실의 동반자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간이라기 보단 사물, 혹은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젊은층의 사고방식이 "세대차를 줄이는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강태규 문화평론가는 신(新) 노인족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태도 변화는 “젊은층이 사회적 변화에 그만큼 유연하고, 특정 세대는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약한 것을 의미한다"고 바라보기도 했다.
강태규 씨는 이런 젊은층의 개방적인 특성을 인터넷 세대의 '검색 문화'에서 찾기도 했다. 그는 “요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게는 없는 '검색기능'이 있는데, 검색이라는 과정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거나 모르는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열린 과정인만큼 새로운 문화 변이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그 이유를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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