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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도 약물 문제에 애써 무관심한 체하던 KBO와 구단, 그리고 언론을 약물 문제와 관련한 공론의 장에 끌어들였다는 것만 해도 이 책 ‘마해영의 야구 본색’은 그 가치를 톡톡히 했다고 할 것이다.
이런 마해영의 책은 대체로 야구계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스포츠서울 기사에 인용된 ‘한 롯데 코치’의 멘트가 시사하는 바 크다. “향후에 검사를 강화할 방안을 고민해야지 과거 일을 들쑤셔 무슨 도움이 되느냐.”라는 것이 그 코치의 발언이었다.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어 혼란을 일으킬 필요 없이,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앞으로 잘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마해영의 폭로도 있고 했으니, 아마 야구계도 김인식 한화 감독이나 김성근 SK 감독,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의 주장처럼 도핑 테스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고치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정말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 혼란을 일으킬 뿐인 무익한 일일까?
메이저리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테로이드 추문에 연루된 메가 스타들 중, 약물 복용을 하다가 적발된 경우는 사실상 최근의 매니 라미레스(LA 다저스)가 유일하다. 라미레스는 메이저리그의 공식 테스트에 걸려 50경기 출전 정지 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외의 선수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 문제가 되고 있다.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는 배리 본즈(전 샌프란시스코)와 로저 클레멘스(전 뉴욕 양키스)는 한 번도 도핑에 걸린 적이 없다.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기간 내내 약물을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다만 이들이 약물을 썼다는 믿을 만한 증언과 넉넉한 정황 증거, 그리고 약간의 물증(본즈와 클레멘스는 이것의 존재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의혹도 철저히 ‘과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들이 앞으로 약물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약물을 썼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올 초 메이저리그를 충격과 비탄에 빠뜨렸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도 비슷한 경우다. 로드리게스가 메이저리그 테스트에 걸린 것은 과거 텍사스에서 뛰던 시절의 일이다.
그 뒤 로드리게스는 여러 차례의 도핑에서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 따라서 로드리게스가 현재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대체로 믿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드리게스에 대해 관대한 여론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미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왜 ‘혼란’을 감수하고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시적인 안정보다 더 중요한 야구의 가치, 야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다. 배리 본즈의 과거를 밝히지 못했다면, 행크 애런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본즈의 스캔들이 드러난 덕에, 애런의 기록의 가치가 다시 조명 받을 수 있었다. 클레멘스는 통산 최다(7회) 사이영상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정행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사이영상의 역사는 훼손되고 정당하게 사이영상을 (클레멘스보다 적게) 받은 다른 투수들의 업적이 폄훼되었을 것이다.
사실 KBO나 구단이 나서서 과거의 약물 문제를 조사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과거의 문제는 양심 있고 성실한 언론에 의해(알렉스 로드리게스 스캔들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가, 본즈 스캔들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발굴했다.), 또는 퇴역 선수나 트레이너 같은 내부 고발자에 의해 드러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언론도, 그런 고발자도 없었다. 이번에 마해영 위원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다. 마 위원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했는지, 책을 팔고자 그러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어쨌든 그의 폭로는 작으나마 중대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의 행위를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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