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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비극적 역사 마주보기…정공법→우회법

박미애 기자I 2017.09.19 06:44:10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아이 캔 스피크’
[이데일리 스타in 박미애 기자] 스크린의 비극적 역사 마주보기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첫 천만영화에 등극한 ‘택시운전사’가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데 이어 14일 개봉한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오는 21일 개봉하는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를 소재로 한 영화다.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지난해 358만명을 모은 ‘귀향’의 특별판으로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 영상과 전편에서 편집된 부분을 삽인해 다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또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정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나 군사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여서다. ‘화려한 휴가’ ‘26년’ ‘박하사탕’ 그리고 최근의 ‘택시운전사’가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다. ‘화려한 휴가’나 ‘26년’ 은 각각 730만명, 296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상업적인 흥행도 거뒀다. 윤성은 평론가는 “5.18민주화운동은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인데도 젊은 세대들 중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이도 있는 만큼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며 “기존의 작품에서 여러 번 소재로 다뤘지만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이 있어서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일제 강점기 성적 착취와 인권 유린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정래 감독은 “‘귀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과 위로였다면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우리가 전하는 약속이다”고 말했다. “35명의 생존자 할머니들이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동시에 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는 게 연출의 변이다.

스크린이 비극적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은 변하고 있다. 정공법을 택하기도 하지만 우회적으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일본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직구라면 ‘아이 캔 스피크’는 변화구로 접근한다. ‘아이 캔 스피크’는 지속적인 민원으로 구청 블랙리스트가 된 옥분과 원칙과 절차를 우선하는 9급 공무원 민재, 두 사람이 영어로 엮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이 캔 스피크’는 한 까탈스러운 할머니의 좌충우돌 영어 정복기로 겉보기엔 코믹 드라마 같지만 할머니가 영어를 공부하는 동기들이 밝혀지는 순간 이 영화에 숨어 있던 ‘진짜 이야기’가 드러나며 가슴 뻐근한 감동을 안긴다. 이 영화는 2007년 2월15일 미국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에서 출발하고 있다. ‘택시운전사’와 유사하다. 극 중반까지 송강호의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하고 인간적인 매력에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가 광주에서 시민들이 군부의 폭압을 당하는 현장을 지켜본 순간 그와 함께 울분을 느끼고 사건을 직시하게 된다. ‘아이 캔 스피크’나 ‘택시운전사’나 사전정보 없이 제목만으로는 숨은 이야기를 짐작할 수 없다. 전찬일 평론가는 “일시적인 현상이겠으나 관객은 무겁고 비극적인 이야기에 부담을 갖기도 한다”며 “‘택시운전사’가 웃음과 감동의 요소로 대중친화적으로 접근한 것이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때 충무로에는 ‘일제 강점기 영화는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모던보이’(75만명) ‘라듸오 데이즈’(21만명) ‘아나키스트’(23만명) ‘청연’(54만명) 등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흥행 면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 시기 영화들의 흥행 부진으로 전문가들은 시대의 비극성을 언급한다. 나라를 빼앗기고 선조들의 희생과 아픔이 서린 시기여서 상업영화로 접근하기 쉽지 않고, 관객들도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군함도’가 실패한 한 가지 이유였다. ‘군함도’는 상업영화로 출발했지만 군함도가 지닌 상징성 때문에 관객은 ‘군함도’를 상업영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화는 비극적인 소재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일제 강점기 영화의 속설을 깬 것은 2015년 천만영화에 등극한 ‘암살’이었다. ‘암살’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첩보액션 블록버스터로 비극적 역사의 차용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였다. ‘암살’ 이후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흥쟁작이 나왔다. 그 가운데 의열단을 소재로 또 다른 첩보액션 블록버스터 ‘밀정’은 750만명을 모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에 우려의 시선도 보인다. 한 영화 관계자는 “역사에 대한 대중과의 접근이나 소통이 용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으나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한계가 있고, 어린 관객들에게는 자칫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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