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의 저니맨⑩]실패에 움추린 나를 발견하다

정철우 기자I 2010.01.18 10:07:38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2004시즌이 끝난 뒤 최익성은 삼성에서 방출된다.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은 SK.
 
그러나 최익성은 의외의 제안을 한다. 계약하기 전 팀에 합류해 테스트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방출 선수가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혹자는 최익성의 괜한 오만과 고집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팀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의 누적된 상처가 그를 힘겹게 몰아부쳤다.
 
다만 그는 대화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법도 몰랐다.
 
현대로 옮겨가면서 난 사람들에게 "언제 또 옮겼냐"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내 이미지가 형성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첫해는 꽤 괜찮았다. 운동장에 있는 자체가 즐거웠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어 좋았다. 난 좌투수 전문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우완 투수나 언더핸드 투수에겐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선을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전혀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꼭 다시 한번 운동장을 미친 듯이 누벼보고 싶었다. 2002 시즌이 끝난 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3년 스프링캠프 부터 또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내 타격폼이 또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번에도 코치님으로부터 타격폼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조금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해도 그런 내 스타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속 시원히 남자답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2003시즌은 그렇게 시작했다. 역시 출발은 좌투수 전문 타자였다. 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부상이 먼저 발목을 잡았다. 시즌 초 잠실 경기였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공을 잡기 위해 달리다 보니 어느새 펜스였다.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끝까지 가면 공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펜스에 부딪힐 것이 분명하다.

망설이지 않았다. 펜스를 향해 돌진했다. 내 야구는 그런 것이니까. 공은 잡았지만 무릎을 다쳤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군에선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둔 연습경기서는 9타수 7안타를 쳤지만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렇게 현대와도 이별이었다. 이번엔 친정팀 삼성에서 연락이 왔다. 단장님까지 직접 연락을 해오셨을만큼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삼성에서도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난 다른 선수들과는 출발부터 다른 선수다.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입단했던 선수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순 없었다.

내 타격폼이 교과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폼으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며 버텨왔다. 그러나 훈련이 시작되면 늘 그 폼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내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실패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주위에선 이런 조언을 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 앞에서만 하는 척 하다 경기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고. 그러나 난 그런 융통성도 기본기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방식대로 인정받는 것 뿐이었다.

다시 시작된 대구 시절은 날 지치게 했다. 다들 날 오뚜기라고 했지만 좌절 또한 컸다.

그때 홀로 술 먹는 법을 배웠다.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바닥까지 추락해봐야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는 것 하나까지 신경쓰며 야구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삶에 지칠때면 한번쯤은 술에 기대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난 다시 그 친구(술)를 멀리한 채 야구에 전념했다.

2004년이 그렇게 흐르고, 코치님들은 내게 1년 더 뛸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아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난 방출을 원했다. 지난 1년과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난 또 방출선수가 됐다.

이젠 정말 날 원하는 곳에서 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SK에서 연락아 왔다. 더 이상 그런 전화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난 구단에 테스트를 제의했다. 그저 선수 한명을 뽑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걸 직접 보고 판단해주길 바랬다.

SK 구단에선 황당해 하면서도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난 영입 제의를 물리치고 테스트를 자청한 뒤 입단한 첫 방출 선수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안고 SK에 입단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겨울 SK는 KIA에서 박재홍을 영입하고 FA로 팀을 떠날 예정이었던 조원우와도 계약을 하게 된다. 한순간에 외야가 포화상태가 됐던 것이다.

시범경기서 난 9타수 5안타 2홈런의 맹타를 휘둘렀고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다.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10타석 만에 2군으로 내려가야했다.

그리곤 2군과 1군을 오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김없이 부상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절대 휴식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TV 하이라이트 속에 비친 날 볼 수 있었다.

내 스윙이 아니었다. 거칠지만 호쾌하던 스윙은 온데 간데 없고 한없이 작아진 날 볼 수 있었다. 계속되는 타격폼 수정 지시에 반발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폼이 작아졌던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가 돼 있었다.

난 다음날 경기가 기다려졌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법도 찾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삼성 전병호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때려냈고 다음 경기서도 또 홈런을 쳤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홈런 한방을 또 때려낸다. 추석 연휴, LG전이었다. 1-3으로 뒤진 9회말 2사 1,2루. 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는 김민기. 난 바깥쪽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깥쪽 커브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방망이가 나갔고 손목이 가볍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공은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끝내기 스리런 홈런. 완전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던 한방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2005년이 끝난 뒤 SK에서 다시 방출된다. 코치님들로부터 절대 방출은 없다는 약속까지 받았었지만 끝내 방출됐다. 그것도 모든 팀들이 전력 보강을 마친 11월31일에.

며칠 뒤 민경삼 당시 SK 운영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날 많이 챙겨주셨던 분이다. 내가 트레이닝 파트에 노하우가 있으니 관련 준비를 하고 있으면 코치로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 놈이,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코치를 할 수 없게될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난 야구 선수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 내 감각을 찾은만큼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 앉게됐지만 포기는 없었다. 날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최향남과 함께 화악산에 들어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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