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블로그] 김성근 야구? 몸만 피곤하면 돼

정철우 기자I 2010.08.02 09:30:53
▲ 김성근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김성근 감독을 거친 선수들은 대부분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갖고 있는 선수들이 많은 듯 합니다. 특히 고참급 선수들이 그런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들과 모두 이야기해 본 것은 아닌 탓에 딱 한마디로 잘라 대답하긴 어렵다. 다만 몇몇 사례들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기는 하다.

SK 투수 가득염은 현역 최고령 투수다. 우리 나이로 마흔 두살이다. 그는 지난 겨울 투구폼을 수정했다.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시작한 도전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캠프기간 중 그는 공들였던 새로운 폼이 무너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밤잠을 설칠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득염은 휴식일에 훈련 지시를 받는다. 운동장에 나가보니 김성근 감독을 포함해 투수 코치 전원, 전력분석팀까지 모두 나와 있었다.

마흔살이 넘은 투수의 투구폼 교정을 위해 이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팀은 없다. 가득염은 “이 나이에도 내가 꽤 중요한 선수로 대우받는다는 기분에 가슴이 울컥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SK는 그런 팀이다. 승리를 위해 필요로한 것들을 갖추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나이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는 연(緣)이 중요하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느 학교를 나왔고 누구의 아들,딸인지는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같은 값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여기에 또 한가지를 추가해야 한다. 나이에 대한 벽이 그것이다.

나이 많은 선수는 언제든 젊은 피에게 밀려날 각오를 해야 한다. 비슷하면 젊은 선수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살아있는 전설이자 기록의 사나이인 양준혁 조차 “내 라이벌은 나이에 대한 편견이었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그러나 SK에는 나이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편견도 없다. 나이의 많고 적음은 이 팀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도 출신 지역도 야구하는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

김 감독을 경험한 모 팀 고참선수는 이런 말을 했다. 짧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고백이었다.

“선수들이 왜 김성근 감독 시절을 좋게 생각하냐고? 그땐 몸만 피곤하면 됐으니까. 그냥 야구만 열심히 하면 되잖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게 얼마나 편한 것인지 느끼게 되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몇가지 절대적인 힘을 가진 단어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리빌딩이다. 가능성 있는 유망주를 키워냈다는 훈장은 지도자의 경력을 크게 끌어올리는 요소다.

성적이 조금 기대에 못 미쳐도 팀을 젊게 만든 지도자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반대의 경우는 팀을 망가트렸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학연이나 지연 문제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나이에 대한 벽은 여전히 높다.

SK도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많은 공을 들인다. SK 역시 정근우 김강민 박재상 최정 김광현등 혈기 완성한 젊은 피가 중심이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에게도 모두 자기만의 역할이 있다. 유망주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먼저 기회를 얻는 경우는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선수가 먼저 경기에 나설 뿐이다.

김 감독은 “이번 LG와 트레이드를 통해 나이 든 선수들이 많이 영입됐다”는 말에 “이제부터 젊게 만들면 된다”고 답했다.

그는 야인 시절 신문사 해설위원을 하며 박경완을 비판한 적이 있다. 플레이가 늙어버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박경완은 불면증과 체력적 문제를 이유로 훈련에서 열외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김 감독 부임 이후엔 그런 일이 사라졌다. 특별히 더 하진 않아도 남들만큼은 다 한다. SK서 남들만큼 한다는 건, 다른 팀보다 훨씬 많이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박경완은 다시 젊어졌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 가볍게 생각해주는 조직은 많지 않다. 세상 그 어떤 편견의 벽 보다도 높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김 감독은 지난 2001년 LG를 맡은 뒤 최동수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위에선 “팀에 유망주가 얼마나 많은데 서른 넘은 2군 선수를 쓰냐”며 비아냥 거렸다. 최동수는 묵묵히 실력으로 비난을 잠재웠다. 김 감독이 물러난 뒤 매년 유망주에게 먼저 자리를 내줘야 했지만 결국엔 그의 차지가 됐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뒤 최동수는 SK 유니폼을 입었고 두번째 경기부터는 4번타자로 기용됐다. 그리고 연패를 끊는 중요한 활약을 펼치며 SK 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인생은 기회를 향한 목마름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한 만큼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 소박한 꿈도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까지 들게 되면 그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은퇴를 선언한 양준혁도 또 다른 전설인 이종범도 늘 같은 말을 했다. “40,50대 가장들에게 그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 내가 뛰어주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고들 하더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나이라는 편견의 벽에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SK 야구도 권하고 싶다. 묵묵히 열심히하는 것 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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