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울고 짜는 영화 싫어… 달콤한 건 더 싫어"

조선일보 기자I 2009.02.26 08:39:12

"극단적 딜레마 속에서 해답 찾는 게 내 방식 과장된 폭력 장면 필요"

▲ “다른 감독님과 있으면 군대에 온 것 같은데, 박찬욱 감독님은 자유분방해 훨씬 편해요.”이전형 대표(왼쪽) 는 박 감독에 대해“눈과 귀와 몸을 젖게 만드는 감각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일보 제공] 박찬욱(46) 감독을 만난 건 23일 밤 9시 30분, 부산. 그는 지금 4월 개봉할 영화 '박쥐'의 후반 작업 중이다. 감독은 컴퓨터그래픽 등 영화 후반작업을 담당하는 회사를 찾아 부산에 온 것. 'AZ웍스'는 부산영상위원회와 국내 유명 후반작업 업체인 HFR이 공동출자해 만든 회사로 '영화산업 인프라 구축'을 기치로 내건 영화적 야심의 상징이다.

올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는 '박쥐'는 흡혈귀가 된 신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흡혈귀 신부(송강호)는 친구의 아내(김옥빈)를 사랑하고 그녀로부터 남편(신하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아 고민에 빠진다. 박찬욱 감독 그리고, 박 감독과 '올드보이'(2003) 때부터 함께 작업한 이전형(37) AZ웍스 대표와 함께 영화 얘기를 나눴다.

―특수 효과를 많이 썼을 것 같다.

박="외모상의 변화는 없다. 송곳니가 자란다든가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실재(實在)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적인 흡혈귀'라는 표현이 모순적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감독님 의도는 '절제된 흡혈귀'였다."

―주인공으로 신부를 택한 건 당신이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인가.

박="내가 도덕적인 질문을 제시하는 방식은,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겪게 만드는 것이다. 신부는 숭고하고 헌신하는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선 남의 피가 있어야 생존하는 사람이다. 그런 딜레마 속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 무신론자다."

―어떻게 보면 캐릭터를 쉽게 선택한 것 같다.

박="관객 중에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이번엔 딜레마를 선명하게 설정했다. 그래서 제목이 '박쥐'다. 천사와 악마,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단호한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극단적 상황이나 폭력적 미학이 관객에게 고문이 될 수도 있다.

박="딜레마 속에서 해답을 찾다 보니 관객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게 되는 것이고, 그걸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폭력적 비주얼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과장해야 질문이 명확해지니까."

이="감독님 작품의 비주얼 작업은 '삼합'과 비슷하다. 처음엔 냄새가 극도로 괴롭지만 어느새 그리워지고 중독된다. 더 고약한 냄새가 뭘까, 씹는 맛이 뭘까를 찾게 된다."

―송강호는 친구의 아내를 탐한다. 사랑이라 해도 금지된 욕망이다.

박="자기의 도덕률과 타협하면서 조율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은 매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내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웃음). 흡혈귀를 내세운 건 욕망을 억압하는 장치를 풀어버리는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폭력적 행동이나 패륜적 욕망도 그의 생존적인 조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풀리는 걸 보면 쾌감을 느끼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되지 않는가."

―당신도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가. 아니면 거꾸로 당신이 가장 금기시하는 걸 담으려 한 건가.

박="난 도덕적으로 꽉 막힌 사람이다. 룸살롱 한번 안 갔으니까."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에서 영감을 받았다던데.

박="에밀 졸라의 '떼레즈 라껭(Therese Raquin)'이다('떼레즈 라껭'은 졸라의 1867년 작으로 암담한 나날을 보내던 여인이 남편 친구와 불륜관계가 되어 남편을 죽이는 내용이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다 담겨 있다. 처음 그걸 읽었을 때, 외람되지만 마치 내가 쓴 것 같았다. (송)강호씨하고 친하기도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지만 '박쥐' 캐릭터가 나와 제일 비슷한 인물이다. 확실히 남 얘기 같지 않다."

이="이 영화엔 밝은 부분도 있다. 밤에 송강호가 (김)옥빈을 데리고 옥상을 뛰어다니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송강호도 무척 밝게 표현됐다. 내가 감독님께 질문하고픈 게 있다. 음식 평론가들이 먹기 싫은 음식을 먹듯, 도저히 끝까지 볼 수 없는 영화도 잘 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박="내게 영화를 고르는 눈은 있는 것 같다. 대신 너무 센티멘털한 거, 닭살 돋는 건 싫다. 울고 짜고 하는 건 정말 싫다. 더 싫은 건 달콤한 영화다."

―그런데 왜 멜로 코드인가.

박="그런 쪽에도 관심이 생겼다. '친절한 금자씨'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내 취향과 관심이 그쪽으로 간 거다. 다음 작품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영어 제목이 'Thirst'(갈증)다.

박="이블 라이브(Evil Live·두 단어는 거꾸로 쓰면 철자가 같다)였는데 'B스러워서(저예산 B급영화 같아서)' 바꿨다. 사지 절단하는 영화라는 오해를 살 것 같아서. 'Thirst'는 뱀파이어의 갈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김옥빈 입장에서도 금지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다. 이 제목, 미국 친구들한테 칭찬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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