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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욕설, 이대로 쓰다간..."들을 수록 이상하네"

고규대 기자I 2012.05.09 08:26:01

억양, 어조 빗댄 유사 욕설, 언어 파괴 우려
"시베리아 귤이나 까라!" "조카 크레파스 색깔이"
`아메리카노` `박순이랭킹` 등 방통심위 조치

▲ `유사 욕설`로 인해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혹은 주의 조치를 받은 `옹달샘`(왼쪽부터 시계방향), `아메리카노`, `박순이랭킹12`, `편파공화국`.(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5월 09일자 36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아, 마돈나 짜증나!”(‘돈나 짜증나’에 강세) “이런 아마존 같은(‘존 같은’에 강세) 경우를 봤나?”

유머일까? 욕설일까?

최근 방송 프로그램에 ‘유사 욕설’이 등장해 이에 대한 경각심에 높아지고 있다. 일부 프로그램은 15세 이상 시청가 등급임에도 욕설을 연상시키는 단어와 대사로 시청자를 유혹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4일 방송 프로그램 심의 의결 결과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등을 사용하는 것을 방송 언어의 사회적 영향력과 시청 대상자의 정서 발달 과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몇몇 프로그램에 대해 ‘권고’ 혹은 ‘주의’ 조처를 내렸다.

‘유사 욕설’의 예는 이렇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용할 수 없는 욕설을 비슷한 단어로 바꿔 억양, 어조를 이용해 실제 욕과 흡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케이블채널 MBC뮤직의 ‘박순이 랭킹12’에서 “어머머, 사발면, 주댕이가 자유분방하구나’ 등의 진행 멘트를 지적했다. 종합편성채널 MBN ‘개그공화국’의 코너 중 “홍씨, 잣까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제 잣 같은 거 그만 까고” 등의 대사도 비슷한 예다.

‘유사 욕설’은 애초 방송 프로그램에서 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풍자한 우스갯소리로 사용됐다. 지금도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할미넴’이 그 예다. 중견 배우 김영옥이 2004년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또 다른 욕쟁이 할머니와 욕설로 다투는 장면이다. “옘병 땀병에 까부리 쏙뱅이를 걸러 딱쟁이 끊어지면 끝나는 거고 십장 딱쟁이 끊어지면 그냥 죽는 거야 이년아 야 이 시베리아들아 귤이나 까라 이 십장생들아”라는 긴 문장은 김영옥 특유의 억양으로 마치 랩처럼 들린다. 네티즌은 이 대사를 빠른 비트의 음악과 편집해 놓고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넘을 본떠 ‘할미넴’으로 불렸다.

이 같은 ‘유사 욕설’은 SNS의 활성화와 종합편성채널의 등장 등으로 급속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트위터에는 ‘농구있네’ ‘축구싶냐’ ‘족구튼게’ ‘야구르지’ ‘씨름놈아’ ‘이따위로 하키냐’ 등 스포츠 경기를 본뜬 유사 욕설도 등장했고, 팟캐스트에는 ‘주옥같은’ 등의 단어도 수시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 같은 ‘유사 욕설’이 성인이 아닌 청소년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데 있다. 성인 시청 가능한 매체나 프로그램은 ‘유사 욕설’은 풍자의 미학이 살아 있다. 직접적인 욕설을 사용하는 대신 비슷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단어로 비꼬는 게 유머의 하나로 비치기도 한다. 정석희 문화평론가는 “지금 사람들은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사회에 불만이 가득차 있다”며 “오히려 이런 분노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반면 ‘15세 이상 관람가’ 프로그램 등에서는 ‘유사욕설’이 자제돼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케이블채널 tvN ‘코미디 빅리그’ 시청자 게시판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얼마 전부터 욕설은 아니나 욕설로 들리는 말들을 하더라”며 “부모로서 참 듣기 거북하기도 하다”며 우려했다. 한 방송 평론가는 “유머와 풍자의 미학이 없이 재미만을 위해 유사 욕설을 만들어내거나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서 발달 과정인 청소년에게 무작위로 쓰일 때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언어의 파괴 현상까지 나타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나 ‘주의’를 받은 ‘유사 욕설’
*“(박그네)홍씨, 잣까지 마십시오”, “(홍씨)아니, 지금 뭐라 그러셨어요, 잣까지 말라니요?”, “(박그네)이제 진짜로 잣까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제 잣 같은 거 그만 까고...”(MBN ‘개그공화국’ 코너 ‘셰프를 꿈꾸며’·3월14일 방송)
*“(하니 엄마)이런 조카크레파스 십팔 색깔이, 안 꺼지느냐?, 안 꺼져?”, “(하니 엄마)이런 씨 발라먹은 수박이, 알았다고, 간다고!(개그공화국 ‘편파중계석’ 코너·3월14일 방송)
*“개쓰레기”(욕설을 영어처럼 발음)(tvN ‘코미디 빅리그’ 시즌2 코너 ‘옹달샘’·3월3일 방송)
*“쥬얼리 짜증나!” “이런 김은정만한 게” “이런 아마존 같은 경우를 봤나”(‘코미디 빅리그’ 시즌2 코너 ‘아메리카노’·3월3일 방송) 

*“이런 CGV” “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라!” “에라이, 십팔색 펜! 쌍화차를 피똥 싸게 부어불까! 이런 사과씨! 수박씨! 씨발라라~ 이런 이십세기”(MBC 뮤직 ‘박순이 랭킹 12’·3월3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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