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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마흔여섯. 이도연 선수는 국가대표 스키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대한민국 선수단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선수도 그의 막내딸보다 어리다. 하지만 동료들을 대하는데는 스스럼이 없다. 스무살 이상 어린 북한 선수들이 그를 “엄마”라 부를 정도다.
그는 “올해 초 독일 월드컵 대회에서 코스를 가르쳐주며 북한 선수들과 친해졌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북한 선수들과 함께 코스를 둘러봤다. 동계패럴림픽 첫 출전인 북한 선수들에게 그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 이 선수는 “(북한 선수단은)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면 들은 척도 안하는데 내가 부탁하면 사진도 잘 찍어준다”고 말했다. 이들은 경기 때마다 소리쳐 서로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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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연은 열아홉이 되던 1991년. 사고로 허리를 다쳤다. 집 밖으로 나서는 일도 별로 없었다. 15년만에 그를 대문 밖으로 이끈 건 탁구였다. 1997년 어머니의 끈질긴 권유로 가까운 생활체육센터에서 라켓을 잡았다. 함께 운동하던 동료들이 국가대표가 되자 국가대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극마크의 벽은 높았다. 2012년 육상으로 종목을 바꿨다. 장애인전국체전에서 창, 원반, 포환던지기 모두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좌절해야했다. 그의 성적으로는 국제대회 출전권조차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육상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체력소모가 큰 종목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핸드사이클에 도전한 이유다. 사이클을 타겠다고 결심한 뒤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법원. 이름을 바꾸고 새 삶을 살고 싶었다. 가족들은 ‘나이 먹어서 무슨 개명이냐’며 말렸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용실에 들러 긴 머리도 짧게 잘랐다. 기분이 상쾌했다. 개명 전 이름을 묻자 “움츠린채로 살았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곧바로 “이도연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스팔트’에서 ‘눈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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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눈밭으로 나섰다.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앞두고 선수를 찾던 감독들의 눈에 띄었다. 노르딕스키는 어깨와 팔을 주로 사용하고 폐활량과 지구력이 필요한 종목이다. 핸드사이클과 사용하는 근육이 비슷하다. 폐활량과 지구력을 갖춘 이 선수가 딱이었다. 하지만 훈련은 쉽지 않았다. 그는 “눈밭은 도로와 많이 달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렸다”며 “추위와도 싸워야했다”고 말했다. 넘어지면 혼자 장비를 풀고 헤쳐나오기를 수차례. 결국 원하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를 힘들게 한건 눈밭만이 아니다. 이 선수는 “장애인 선수들이 뛸 수 있는 실업팀이 많지 않아 장비나 훈련비용을 사비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기업들이 장애인 선수들을 광고모델로 발탁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는 “배동현 선수단장이나 권지훈 노르딕스키연맹 사무국장 등 도움을 주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며 “이번 패럴림픽을 계기로 조금씩 인식이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5년 허송세월 아쉬워..도쿄 넘어 베이징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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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수가 가장 아쉬워하는건 ‘나이’다. 그는 “조금만 더 젊었다면 더 많은 종목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장애를 얻은 이후 숨어살다시피 했던 15년이 너무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패럴림픽 금메달이 꿈이기 때문에 힘 닿는데까지 도전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장 다음달 1일부터 주 종목인 핸드사이클 합숙훈련이 예정돼있다. 휴식기간은 단 2주 뿐. 2020년 도쿄 하계패럴림픽에 도전하기 위한 강행군이다. 출전권을 얻으려면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 등에서 반드시 두 번 이상 우승해야하기 때문에 각오가 남다르다.
그는 “지난 리우패럴림픽 때 놓쳤던 금메달을 반드시 따고야 말겠다”며 “젊은 선수들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만큼 더 열심히 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2022년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에서도 노르딕 스키 국가대표로 나서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