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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대한민국이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 진출에 실패한 뒤 해설위원으로 참여했던 차범근 전 감독은 이런 글을 남겼다.
“운재, 정환이. 많이 아쉽겠지만 감독을 지낸 내가 가장 잘 안다. 팀이 여기까지 올려면 벤치를 지키는 고참들이 자신들의 아쉬움을 얼마나 삭이고 참아줘야 하는자. 내가 대신 고맙다고 할게. 골프 한번 낼게.”
짧은 문장이었지만 노장이 왜 팀에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진하게 느껴지는 진심 어린 글이었다.
노장은 당장 눈 앞의 1승을 위해 필요한 존재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팀을 이끄느냐에 따라 긴 승부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앞에 나서 선수들을 이끄는 유형의 리더 보다는 뒤에서 후배들이 보고 따를 수 있도록 묵묵히 함께 가는 노장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운재와 안정환이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1일 광주 SK-KIA전의 MVP는 나주환이었다. 첫 타석에서 승부의 기운을 가져온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등 4타수 3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그는 편도선이 잔뜩 붓고 몸살 기운까지 겹쳐 경기에 나서기 힘들었다. 전날(6월30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허락을 받고 원정 호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주환은 전날 경기가 시작될 무렵 슬쩍 덕아웃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대타로 나서 3타석을 친 뒤 1일 경기서는 스타팅 멤버로 뛰었다. 몸은 물론 별반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경기 후 나주환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 경기에 나가는 선배님들 생각에 그냥 쉬고만 있을 순 없었다”고 했다.
SK 선배들 중엔 나주환 정도 아프지 않은 선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선수는 포수 박경완이다. 수술 받은 왼쪽 아킬레스건은 물론이고 이젠 오른쪽까지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매일같이 경기에 나서고 있다.
경기만 끝나면 찢어질 듯한 통증 탓에 1시간 넘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지만 그의 입에선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SK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남아있지 않은 힘까지 끌어다 쥐어 짜내며 플레이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중심엔 박경완이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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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할 때를 빼면)그는 한번도 후배들에게 “아픈 나도 이렇게 뛰는데 너희도 참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말 없이 장비를 챙겨가는 그의 뒷모습에 더 큰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삼성 양준혁은 1일 대구 롯데전서 끝내기 안타를 때려냈다. 삼성은 이틀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두며 8연승 신바람을 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양준혁의 방망이에서 터져나온 안타였다. 그가 안타를 때려낸 건 지난 6월17일 롯데전 이후 2주만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터트린 끝내기 한방은 삼성 선수들에게 저릿한 무언가를 안겨준, 1승 이상의 선물이었다.
양준혁이 올 시즌 가장 많이 맡고 있는 임무는 대타다. 세대교체의 바람에 밀려나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천하의 양준혁이 말이다.
그러나 양준혁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덕아웃을 지켜내고 있다. 우리 나이로 마흔 네살. 언제일지 모를 한방을 위해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꾸준히 기회를 얻고 싶은 건 모든 선수들의 가장 큰 목표다. 하지만 양준혁은 좀처럼 속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자리를 꿰찬 후배들을 앞서서 응원하는 도우미 노릇에도 열심이다.
양준혁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회가 오지 않았을 땐 내 현실을 인정하면 된다. 내가 부족하니까 못나간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준비하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거기서 좌절하면 또 한번 찾아올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쉽지 않은 일이다. 양준혁급 고참이 감독의 기용 방법 등에 불만을 품고 감정을 표출한다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양준혁은 지금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후배들을 위해 박수쳐 주는 일 또한 그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삼성 4번타자 후보인 최형우는 늘 이런 말을 한다. “우리 팀은 양준혁 선배님이 계실 때 진짜 강해집니다.” 최근 삼성의 행보에 그의 말을 비춰보면 무슨 의미인지 답이 금방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