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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덕혜옹주’는 서사 드라마라기 보다 멜로에 가깝다. 허진호 감독이 가장 잘 만들고 팬들이 허진호 감독에게 가장 원하는 분야가 멜로일 터. 허 감독은 격랑의 역사 속에서 살아간 덕혜옹주의 서사 드라마를 자신의 장기인 멜로로 풀어냈다. 멜로는 덕혜옹주를 중심으로 김장한(박해일 분), 복순이(라미란 분), 조선이 얽히고설킨 채 그려진다. 남녀의 멜로일 때도, 여성 간 워로맨스(woromance)일 때도, 조선민초와의 공명일 때도 있다.
권비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덕혜옹주’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드라마틱한 픽션을 가미해 만들어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대한민국 정부의 허락으로 입국하기까지 길고 긴 일생이 그려진다. 그 중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광복을 맞고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까지 초점을 맞춘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야 했던 덕혜옹주(손예진 분)는 아버지인 고종(백윤식 분)이 어릴 적 맺어주려했던 약혼자 김장한(박해일 분)을 만나게 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김장한은 촉망받는 일본군 장교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족 이우(고수 분)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몰래 나선다.
김장한은 어느날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상하이로 망명시킨다는 계획을 털어놓는다. 계획은 친일파 한택수(윤제문 분)에 의해 좌절된다. 덕혜옹주는 망명에 실패한 채 일왕에 의해 강제로 일본인 귀족과 결혼을 한다. 광복이 되지만 덕혜옹주는 대한민국 초대정부로부터 입국이 불허돼 그 아픔으로 인해 정신병동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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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스로 ‘인생작’이라고 평하는 손예진의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성인 덕혜옹주를 맡아 처연한 눈빛과 구슬픈 말투로 보는 관객의 가슴에 파고든다. 시대의 아픔을 몸소 경험한 덕혜옹주의 삶이어서 영화 속에서 손예진의 웃음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과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 손예진의 낮게 깔리고 읊조리는 대사에서 묻어난다. 광복 이후 모국에 건너가지 못한다는 말에 정신 잃은 듯 오열하는 시퀀스나 대한제국 궁녀들과 공항에서 재회하는 신은 손예진의 깊은 연기 내공을 가늠하게 만든다. ‘연애소설’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으로 멜로 연기에 일가견을 보인 손예진은 이번엔 또 다른 형태의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고 평할만하다.
덕혜옹주가 영화적 픽션으로 인해 관객에게 어떻게 미화될지 염려되는 게 아쉽다. 비운의 주인공이라고 인간적인 연민을 받는 여인이라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 안되는 일이다.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직접적 묘사가 오해를 낳을 수 있어 “조선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담아내는 간접적 상징으로 표현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