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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블로그] 9월, 누군가의 은퇴경기가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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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우 기자I 2010.09.10 08:31:34

한화 구대성 은퇴

▲ 구대성 [사진제공=한화이글스]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며칠 전 기사를 위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인사이클로피디아를 뒤적이다 문든 낯선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승환(1998년 쌍방울 1경기 1.1이닝 10타자 4피안타 2볼넷 3실점)
고호봉(1998년 현대 1경기 2이닝 11타자 3피안타 2사사구 2실점)
박상일(1995년 태평양 1타석 1삼진)
오희진(1998년 쌍방울 1타석 병살타)

프로야구에 입단했지만 1군에선 단 1경기 기록만 남긴 채 은퇴한 선수들의 이름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 밖엔 어설프게나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달력은 9월로 넘어가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경기가 9월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월이면 5명의 엔트리가 늘어나고,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선수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다다르자 마음 한켠이 괜히 서늘해졌다.

9월의 프로야구는 솔직히 맥이 풀린 경우들이 많다. 대부분 팀 순위가 결정된 뒤의 경기들이기 때문이다. 개인 기록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승부 자체에 의미가 깊은 경우는 많지 않다.

혹 유망주들이 나오게 된다면 모를까, 그마저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선수들이 아니라면 그저 스쳐가는 한 경기의 한 모퉁이에 불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을 바꿔보면 어느 경기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누군가에겐 그 경기가 은퇴 경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난 2일 한화의 살아있는, 아니 이제 살아있던 전설이 된 구대성의 은퇴경기가 열렸다. 은퇴경기에 있어서는 이제 달인 수준에 오른 한화 구단 답게 매우 성대하고 화려하며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된 뒤 은퇴 경기를 치른 선수는 구대성을 더해 모두 14명에 불과하다. 은퇴식은 제법 많았지만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자신의 야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셈이다.

반대로 은퇴경기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끝을 내는 선수는 수백명에 달한다. 평생 잊지 못할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건 참 아픈 이야기다.

우리는 쉽게 ‘다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제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엘리트 소리를 듣던 선수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프로의 선택을 받는다.

프로에 들어오면 경쟁은 더욱 심해진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펼쳐보이지 못한 채 마지막을 맞아야 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이름을 알리지 못한 선수들 뿐 아니다. 오랜 세월을 버텨내며 제법 명성을 쌓은 선수들도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아무도 기약하지 못한다. 언제 어느 경기가 그의 은퇴경기가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없다면 프로야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은 크게 빛이 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을 흘려주어야만 프로야구라는 생물이 성장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SK 최고참 투수 가득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점수차가 많이 날 때 등판하면 야유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내겐 더 없이 중요한 기회다. 그 경기를 통해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도 있다. 반대로 그 경기가 내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젠장, 뭐 이런 막장 경기가 다 있어”라며 운동장을 나서거나 TV를 꺼버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절실한 또 하나의 인생, 그리고 마지막 도전이 시작될 수 있다.

프로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다. 그러나 그 1승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이름 남지 않는 누군가의 땀과 눈물이 숨겨져 있다. 스타플레이어들의 화려함만으로 절대 이길 수 없다.

얼마 전 고질적인 부상 때문에 은퇴를 결심한 한 노장 투수의 전화를 받았다.

“재미있는 건 말입니다. 내가 이제 공 던지는게 어떤건지 알 수 있게 됐다는 거에요. 야구한지 30년만에 투수가 뭔지 알 수 있게 됐다구요. 그런데 이젠 공을 던질 수 없는 몸이 됐어요. 좀 더 일찍 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옷 벗는건 두렵지 않아요. 다만 나 말고 다른 후배들도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마지막으로 공을 던지던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을 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마운드에 서 있었던 모습은 꼭 잊지 않을게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올해 9월 하늘이 유달리 우중충하게 느껴지는 건 꼭 날씨 탓 만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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