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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한국 야구가 야구 월드컵이라는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하러 미국에 왔던 2006년 3월의 어느 날.
그 날은 LA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이빨이 부딪치는 떨림을 느껴야 했던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애너하임의 에인절스타디움을 찾아가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야구장에 가면 늘 볼 수 있었던 선수들과 기자들, 야구 관계자들….
그리고 또 한 사람, 김인식 감독이었습니다.
마침 다음 날 멕시코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기자들과 대화가 한창이어서 인사는 생략하고 그 뒤에 묻혀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얼마 못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보자마자 그는 이름을 부르더니 살갑게 웃으며 “이리 와” 하였습니다. 순간 뭔가가 얼굴로 확 끼얹듯 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코치들과 선수들, 심지어 기자들까지 늘 사람들로 붐빕니다.
어려움에 빠져 있던 코치를 데리고 있다가 그가 다른 팀의 오퍼를 받자 “더 좋은 자리가 있다면 당연히 가야지”하면서 보내줬습니다.
선수도 후보 선수들을 더 챙깁니다. 95년 당시 맡고 있던 OB가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을 때였습니다. 미팅에서 주전에 가려있던 선수들을 일일이 일으켜 세우면서 “너희들이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잘 참아줘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바로 너희들이 1위의 최고 공신들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즐거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마감 시간 때문에 감독 인터뷰를 미리 송고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터뷰는 경기 전에 마쳤지만 문제는 우승이 확정된 다음의 현장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기자는 상황을 미리 설정해놓은 뒤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덕아웃으로 달려가 “기자실에 들어오면 먼저 담배부터 하나 달라고 해서 피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남들에겐 그렇지만 자신에겐 매우 엄격한 그입니다. 구단이 스타 출신 젊은 감독을 영입하려고 하자 후배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며 9년간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 번이나 시켰으면서도 미련 없이 용퇴하였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가장 매력은 바로 ‘큰 사내’라는 점입니다.
그의 초상화를 그릴 때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풍경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한번 맺은 인연을 가벼이 하지 않고 소중히 한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의리’란 말로 응축됩니다.
그리고 그의 의리는 결코 작은 것을 위한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그랬고, 그 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그랬습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2라운드 경기 일정을 뒤엎었을 때도 “상대팀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야구에서 이런 세계적인 대회는 처음이다. 무엇보다 세계 야구 보급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겠다”고 의연하게 말했습니다. 대(大)를 위해서라면 소(小) 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입니다.
불과 1년여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 자유스럽지 못한, 아니 힘겨운 몸인데도(그는 일본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강행군 탓에 한국에서 해오던 식이요법, 재활 운동 등을 전혀 못하고 있다며 기자에게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대표팀 사령탑을 선뜻 맡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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