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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내륙 국가 르완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종 대학살이 벌어진 나라로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무려 80만명이 목숨을 잃은 대학살이 겨우 30년 전인 1994년에 일어났다.
지금의 르완다는 악몽의 흔적을 지우려 노력한다. 사회는 빠르게 질서를 되찾았고, 국민들은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 매년 평균 7%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국가 수입의 17%를 해외 원조에 의존한다. 생활 수준이나 환경은 여전히 낙후돼 있다.
정지만(36) 국기원 정부 파견 사범(태권도 7단)은 르완다에서 태권도 보급 및 발전에 앞장서는 주인공이다. 그는 르완다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 2명과 함께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전라북도 무주군 태권도원에서 열린 태권도 대회에 참가했다. 르완다에서 출발해 우간다 엔테베,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24시간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정 사범은 경원대(현 가천대) 태권도학과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국기원 시범단으로 활동했다. 이름도 생소한 르완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14년이었다.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금은 폐지된 코이카(koica) 국제협력요원으로 30개월간 복무했다. 그때 태권도 사범으로 파견된 곳이 바로 르완다였다.
“처음 갔는데 르완다 사람들이 태권도를 아예 모르더라고요. 도복을 입고 있으니까 가라데 선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시범단 출신이다 보니 가는 곳마다 시범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나무 같은 게 보이면 격파 시범을 닥치는 대로 한 것 같습니다(웃음)”
당시 르완다는 상류층 사이에서 가라데가 어느 정도 보급된 상태였다. 일반 국민들에겐 남 얘기였다. 정 사범은 문화생활을 접하기 어려운 가난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 직접 찾아가 태권도를 가르쳤다. 사비를 들여 차비를 줘가면서 태권도 수업에 오도록 이끌었다.
정 사범은 30개월의 병역 의무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르완다를 잊지 못했다. 학교에서 근무하던 중에도 두 차례나 휴가를 내 가족들과 함께 르완다를 방문했다. 자비로 태권도 수업을 열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 와중에 국기원 해외 파견 사범 모집 공고가 뜨자 재빨리 지원했다. 안정된 직장에 이미 결혼까지 했지만 르완다 아이들과 추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2021년 다시 르완다행 비행기를 탔다.
“르완다로 다시 간다고 하니까 저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르완다 사람들과 추억이 저를 다시 부른 것 같아요. 아내도 다행히 제 마음을 잘 이해해 준 덕분에 르완다로 갈 수 있었습니다”
1988년생인 정 사범은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르완다 태권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현재 르완다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협회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크고, 작은 대회를 직접 개최하고 각종 수업을 열면서 르완다 태권도 발전을 이끌고 있다. 그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불모지였던 르완다의 태권도는 어느덧 수련생이 1만여 명까지 늘어났다.
정 사범의 바람은 르완다 태권도 수련생들이 더 편안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운동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대표 훈련 센터를 만들어 국제 경쟁력도 키우는 것이 목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온다면 르완다에 태권도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한다.
“아직은 인프라 등이 매우 부족합니다. 태권도 수업도 대부분 운동장이나 공터 등에서 주로 열려요. 국가대표 선수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뜨거운 땡볕 속에서도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희망을 느낍니다. 아직은 올림픽 출전에 나간 선수가 없지만 4년 뒤 LA올림픽에선 르완다 국가를 단 국가대표가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